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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y 20. 2023

생각 없이 달리기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하루키


글쓰기만큼 좋아하는 것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달리기를 꼽겠다. 책을 읽고 글쓰기를 끝낸 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오후 6시가 되면 나는 집 앞 천으로 나가 5km 정도 가볍게 달린다. 평균 러닝 타임은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5분 중반대. 기분 좋게 러닝을 하고 집에 와 미지근한 물로 몸을 씻으면 그것으로 내 하루는 마무리된다.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달리는 내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힘들다' '그만 뛰고 싶다' 등의 생각은 달리는 내내 하는 편이지만 딱히 그것을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드는 잡생각이나 걱정, 고민에 비하면 그것들은 생각이라기보단 감정에 가깝다랄까.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지 않냐는 말을 할 수도 있는데 나는 태생적으로 그게 잘 안되는 사람이다. 그렇다. 나는 지나칠정도로 생각이 많은 '프로걱정러'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루의 계획을 짠다. 어제보다 더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갠다.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일정을 빡빡하게 소화한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보며 굉장히 열심히 산다며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런 내가 너무도 싫다. 살짝이라도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면 스스로를 자책하는 내가 너무도 밉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10km 마라톤에 참여하게 되었고 연습을 위해 동네 천을 뛰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평소에는 그렇게 많이 들던 잡생각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뛰는 것에만 집중했다. 아니 그렇기보단 남은 km 수를 계산하며 열받기에 바빴다고 해야 하나. 5km를 다 완주한 뒤에야 깨달았다. 몇 개월 만에 아무 생각 없이 뛰는 것에만 집중했다는 것을.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마다 자리를 박차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고, 지금은 습관이 되어 거의 매일 러닝을 하고 있다.




서머셋 몸은 "어떤 면도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라고 쓰고 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매일 계속하고 있으면, 거기에 뭔가 관조와 같은 것이 우러난다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서문 中- 


나는 어느 분야에서든지 그 일을 10년 이상 지속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신뢰하는 편이다. 사람 자체에 대한 믿음도 분명 있겠지만 똑같은 일을 10년 동안 반복한 그 과정에서 신뢰감이 생긴다. 우리가 대부분의 전문가를 믿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라면 그의 말과 행동에는 자신감이 깃들어 있다. 서머셋 몸이 말했듯 사소해 보이는 면도라도 그 일을 10년 동안 꾸준히 해왔다면 그는 이미 전문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고, 그 행동에는 분명하게 자신만의 철학이 담겨있다.


이는 면도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회사에서 10년 이상 같은 일을 한 사람이든, 자신의 사업을 10년 이상 지속했든 꾸준히 한 분야를 판 사람은 분명 자신만의 철학이 존재한다. 소설가인 하루키에게는 그 분야가 글과 달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루키는 전업작가가 되길 결심한 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오늘은 무얼 써볼까...'하고 고민한 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분량의 글을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쓴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시즌이 다가오면 일주일에 6번은 무조건 달린다고 말한다. 꾸준하게 글을 쓰고 꾸준하게 달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그의 일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고 그것으로 보통 수준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나로서는 부족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p.67


하루키의 인생 가치관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소확행"이다. 큰 것을 바라지 않고 일상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것. 거기에 더해 다른 이가 정한 행복에 자신의 행복을 끼워 맞추지 않고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그의 행복이자 철학이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다들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래 행복이란 가까이 있을수록 더 희미하게 보이는 법이니까. 


한창 소확행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조금 자취를 감춘 것 같다. 주변을 둘러봐도 소확행을 느끼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사회가 전반적으로 우울해진 것도 있고, 경기도 많이 안 좋다 보니 확실히 일상에서 행복을 찾기 어려운 시기가 맞긴 한가 보다. 


소소하게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 역시 일상에서 행복을 찾기보단 멀리 보이는 행복에 집착하고, 남들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을 비교하는 것에 길들여져 버렸다. 그래도 결국 지속적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일상으로부터 행복을 뽑아내는 것뿐이다. 나는 한 달여간 공부한 자격증 시험을 끝내고 오랜만에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오늘의 소확행으로 삼았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의 소확행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하루하루 꾸준하게 글을 써야 하는 소설가처럼 마라톤 역시 하루하루 꾸준하게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글쓰기에도 달리기에도 모두 그에 맞는 근육이 필요하다. 하루키에게 있어 달리기는 글을 쓰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더 좋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달리기도, 글쓰기도 경쟁이 없는 나 자신과의 경주이기 때문에 그가 흥미를 잃지 않고 꾸준히 지속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책의 서문에도 나와있듯 이 책은 달리기에 관한 책이 아니다. 책 제목 역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고 꾸준히 할 수 있는 활동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인 것. 나 역시 달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책의 제목에 끌린 것은 맞지만 달리기를 잘하는 법이라거나 달리기가 좋은 이유가 줄줄이 적혀있었다면 이만큼 길게 글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달리기는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본다. 하루키처럼 마라톤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뛰는 것도 아닌데 매일 달리는 이유를. 앞에서 말한 대로 나는 생각을 비우기 위해서 매일 달린다. 글을 쓰기 위해 드는 수많은 생각과, 잡념들, 계속해서 나의 머리를 휘젓는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달린다.


글쓰기는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고 달리기는 내게 있어 생각을 비울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어느 한 가지라도 무게가 쏠린 순간 내 일상의 평화는 무너진다. 오늘도 이 글을 쓰느라 생각을 너무 많이 했다. 이제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비울 차례다. 어서 글을 마치고 늘 달리던 천으로 나가 생각 없이 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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