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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y 22. 2023

노트의 목소리가 들릴 때면

[소설] <우주를 듣는 소년> - 루스 오제키


살면서 여러 번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내 앞에 보이는 사물이 내게 말을 건네면 어떨까? 조금 음침해 보이긴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사물이 살아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특히, 애착이 많이 가는 사물을 상대로 그런 망상을 자주 하곤 했는데 중학교 시절 학교를 오가며 매일 타고 다니던 자전거에 '삼팔이'라는 이름을 붙여 대화를 하기도 하고 실내화가방에는 '스타'라는 이름을 붙여 오늘의 일상을 하소연하기도 했다. 친구가 없어서 딱히 외로운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혼잣말을 들어줄 대상이 필요했나 보다. 전형적인 중2병이다. 


이런 과거의 내 모습이 이상하고 미치광이처럼 보인다면 이 책을 읽어볼 만한다. 루스 오제키의 장편소설 <우주를 듣는 소년>은 사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소년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주인공 베니는 사물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충격으로 과거를 놓지 못하는 저장강박증에 시달리게 된다. 소설은 특이한 능력을 가진 소년의 성장기와 남편의 부재와 사춘기 소년의 감정을 동시에 감내해야 하는 싱글맘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제목과 작품설정만 본다면 SF소설로 생각할 수 있지만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 철학적인 생각을 들게하는 작품이다.



"그건 한 때 모래였어요. 모래였던 때를 기억하죠. 새들을 기억하고 새가 걸어 다니며 작은 흔적을 만들 때 그 발이 어떤 느낌인지도 기억해요. 그건 유리가 되고 싶어 한 적이 없어요." p.110

어느 날 주인공 베니의 교실에서 참새가 투명한 유리에 부딪혀 숨을 거뒀다. 사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주인공 베니는 주위의 소란소리에도 불구하고 슬프게 흐느끼는 유리의 목소리를 들었다. 베니는 유리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그것이 참새에게 미안함을 느낀다고 사람들에게 말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조차 그를 믿어주지 않았고, 상담사의 권유로 2주간 폐쇄병동에 입원하게 된다. 자신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그날부터 베니는 스스로 세상과 등을 돌린다.


참새가 비행을 멈추고 잠시 땅과 하나가 되었을 때, 그 안에 있던 모래는 유리가 되었다. 스스로 유리가 되고 싶었는지는 유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베니가 아니라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타인에 의해 모래의 삶이 결정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유리뿐 아니라 베니 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베니에게 계속해서 말을 거는 것도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달라는 게 아닐까. 나는 원래 가위가 되고 싶지 않았었다고,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되고 싶지 않았었다고.


사물이 인간과 같이 스스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참 섬뜩하면서도 신기하다. 인간의 기원이 단 하나의 세포라면 사물의 기원 역시도 하나의 원소였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다 기억하듯이 사물도 자신의 변천을 모두 기억한다. 우리가 책이라고 단정했던 이 사물 역시 하나의 종이였을 것이고 한그루의 나무였을 것이며 작은 씨앗이었을 테다. 나 역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의 나와 똑같진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경험과 교육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을 터. 사물에 비해선 나름 주체적인 선택이 가능했으니 이런 면에서는 사물보다는 덜 억울한 편이다.


사물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전에 없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서점에서 처음 책을 발견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책의 표지는 상대방과의 첫인상이 되고 책의 제목은 상대방의 이름이, 책의 첫 페이지는 상대방과 나누는 첫인사가 된다. 사물이 살아있다고만 믿으면 그간 보이지 않던 상호작용의 범위가 크게 늘어난다. 물론 하나하나의 사물과 모두 상호작용하는 것은 무척 큰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자신이 애착을 두고 있는 물건 한두개쯤은 살아있다고 믿어보면 어떨까? 어떤 사물이건 사랑을 주는 만큼 그 애정이 커지는 법이니까.




"네가 지구온난화에 분노를 느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어떤 연관관계가 있을까?" p.137


사물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린다는 베니의 말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우리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보통 "정신병자" 혹은 "미치광이"로 부른다. 또 100번 양보해서 사물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대화의 진정한 내용을 궁금해하기보단 그 행동의 원인과 이유를 밝히려고 애쓴다. '언제부터 사물의 목소리가 들렸니?' 라거나 '왜 사물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하니?' 등 그가 원하는 논점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결론을 내는것이 가장 최선의 마무리라고 생각한다. '베니가 사물의 목소리를 듣게 된 원인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고, 이는 정신병에 해당하며 ... '라는 식의 결론 말이다.  


이러한 과정은 절대적으로 그 대상을 돕기 위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베니를 위함이 아니라 자신은 "평범하다"고 말하는 그들을 위한 일이다. 그들은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에 에너지를 쏟기보단 원인과 결과의 상관관계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치료'나 '해결방안' 등을 내세우며 그들이 주장하는 "평범함"으로 사람을 개조하려 든다. 과연 정말로 베니가 원했던 것이 자신을 '치료'하는 것일까?


정신질환을 예로 들었지만 이는 모든 장애에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장애를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서 바라본다. 모든 장애인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며 정상이 되는 것만이 장애인의 행복이라고 믿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착각이다. 베니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자신이 정상으로 불리는 것만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상으로의 회기, 또는 평범한 사람으로 불려지는 것보다 조금 다르지만 자신을 이해해 주는 따듯한 시선, 그리고 그들을 인정해 주는 온화한 세상이 아닐까.




"목소리를 듣는 것이 정말로 항상 나쁘기만 한가요? 그게 꼭 베니가 조현병 환자나 정신병자라는 뜻인가요? 베니는 항상 창의적인 아이였는데, 어쩌면 목소리를 듣는 것도 창의성의 일부가 아닌가요?" p.671



현실 속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현실을 외면하곤 한다. 눈앞의 끔찍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오히려 자신을 깎아먹는 행동이라며 주변에서는 정신 차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직접 겪어본바로 눈앞의 끔찍한 현실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갑작스럽게 비친 빛을 마주하기 위해 서서히 눈을 떠야 하는 것처럼 슬픔이 가득한 상황에서 현실로 복귀하는 데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생겨난 슬픔을 해소하기 위해선 '애도'의 과정이 필연적이다. 충분한 애도가 없다면 마음의 병은 더 곪아버리고, 쉽게 현실로 복귀하기 어렵다. 소설 속 모녀에겐 애도할 상황이 충분치 않았다. 어머니인 애너벨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몸과 마음을 기댈 친구와 친척이 충분하지 않았고 베니 역시 12살의 이른 나이에 아버지와 이별했다. 그들은 충분히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애나벨은 애도의 시간 없이 바로 돈과 관련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바빴고, 아들인 베니는 충분히 슬퍼할 겨를 없이 일상으로의 복귀를 강요받는다. 애도의 부재가 그들을 더욱 미치게 만든 것이다.


소설 결말부에 베니와 어머니는 결국 서로를 이해한다. 어머니는 과거와 달리 베니를 더 이상 치료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이 저장강박증에 해당한다는 것. 특히 과거 남편의 물건에 집착하는 것도 스스로 인정한다. 베니 역시 자신이 사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숨기려 하지 어머니께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본인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였고, 또 상대방의 상태 역시 이해하였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이해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사물로부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나는 항상 나와 일상을 함께하는 내 노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내가 노트에 적는 모든 글들은 노트에게 있어선 곧 "문신"과 같다. 쓸데없이 생각나는 농담, 오늘 할 일을 휘갈긴 메모,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던 말들 이 모두 노트에겐 지워지지 않는 문신인 것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노트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준다. 노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나의 노트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문신들을 보며 무슨 말을 내게 건넬까? 


지금으로선 노트의 목소리가 내게 들리지 않기 때문에 나의 노트는 그냥 묵묵히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꿈에서라도 들을 수만 있다면 듣고 싶다. 내가 만든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힘을 주어 쓴 글씨가 새겨질 땐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거부하고 싶었던 문신은 무엇이었을지, 어느 글을 쓸 때 내가 가장 행복해 보이는지 말이다. 주위의 사람들은 나를 미치광이로 바라보겠지만 개의치 않겠다. 눈을 감고 나의 노트를 귀에 가까이 가져가 목소리를 찾아본다. '너는 내게 어떤 말을 하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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