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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y 24. 2023

나혜석, 세상과 맞짱 뜬 여성

[소설] <붉은 꽃 나혜석> - 정규웅


세상과 맞짱 뜬다는 사람치고 정상인은 없다. 맨몸으로 세상과의 결투를 신청할 때부터 이미 "비정상인"이라는 딱지가 붙고 싸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그 맞짱은 대게 세상의 압승이다. 패배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세상은 그에게 "패배자"라는 칭호를 붙여준 채 굴복을 강요한다. 그 결과로 싸움을 건 사람의 몸과 마음 중 하나는 필연적으로 망가진다. 한 개인이 세상과 싸워 이긴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우리는 세상에 복종한 채 사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물론 그랬다면 우리 세상은 먼 과거에서 발전하지 않은 채 그대로 머물렀을 것이다. 세상과 맞서 싸운 사람, 혹은 단체가 있었기 때문에 시대는 변화하고 세상은 움직인다. 오늘 읽은 책의 주인공 "나혜석" 역시 세상과 맞서 싸운 사람 중 한 명이다. 전에 없던 서양화의 등장으로 조선을 놀라게 한 인물로서, 또 전에 없던 여성에 대한 목소리로 또 한 번 조선을 놀라게 한 인물로서.


소설 <붉은 꽃 나혜석>은 나혜석을 사랑했던 실재 인물 '사토 야타'와 지금 이 시대에서 한국의 여류화가로 살고 있는 가상인물 '진여희'가 바라보는 나혜석의 일생이다. 두 인물 사이에는 약 100년이라는 시차가 존재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나혜석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 소설을 쓴 작가 정규웅은 2003년에 <나혜석 평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평전은 소설과 글의 성격이 극명하게 차이 나는데, 작가가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나혜석의 이야기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조선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태어나면서부터 몸종으로 신분이 정해져 있는 것과 같아요." p.110


글을 읽고 나혜석에 관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평가가 가득했다. 대한민국의 최초 여류 서양화가가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였지만 파격적인 행보의 여성작가, 전례 없던 신여성운동가, 대한민국의 첫 페미니스트 등 '여성'과 관련된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그녀가 평범한 서양화가였다면 우리가 이렇게 주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바라보기 전 그녀의 일생을 알아보아야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지금까지도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미술작품이 아닌 그녀가 남긴 글이었다. 1923년 그녀는 아이를 출산한 뒤 <모된 감상기>라는 글을 작성하였는데, 그 글에는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뜯어먹는 악마다"라는 충격적인 문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문장이 참 괴이하게 들리는데, 보수적인 유교관념이 가득했던 당시에는 얼마나 파격적이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저기 있는 문장 하나만으로 그녀의 인간됨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른 뒤 1934년, 나혜석은 잡지 <삼천리>에서 "모성애로 인하여 얼마나 만족을 느꼈으며 행복스러웠는지 모릅니다."라고 하여 다시 한번 모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 나혜석의 이러한 심경변화는 아마 '모성'이라는 것은 여성이 선천적으로 꼭 지녀야 할 '정조'가 아니고, 후천적으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출산으로 인한 여성의 고통과 육아로 인한 괴로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유교 관념과 맞짱을 뜬 것이다.




나혜석은 같은 잡지에 "조선남성 심상은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들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라고 말하며 또 한 번 세상과 맞짱을 신청한다. 조선시대의 남성이 부인 외에 2~3명씩 첩을 두는 것은 아무런 문제 삼지 않으면서 여성이 남편에 대한 정조를 지키지 않으면 따갑게 질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남성과 여성 모두 각각 한 명의 배우자를 두는 것이 당연한 시대지만, 당시에는 일부다처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 나혜석은 다시 한번 그 "당연한 것"에 저항하고 맞짱을 신청한 것이다.


현대시대의 관점으로 그녀의 행보는 '레디컬 페미니즘'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현대시대의 관점이 아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대에, 아니 그 이전에 여성의 인권이 처참하게 박탈당했던 시절에, 여성의 정조가 당연하게 여겨진 그 시대에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직접 행동으로 옮기며 당당하게 맞선 그 사실에 우리는 집중해야 한다. 한 개인이 사회의 통념과 고정관념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일인지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난 앞으로도 내가 생각하는 것을 언제든지 행동으로 말로 글로 보여줄 거야. 누군가가 먼저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면 내가 걸어가겠다는 거지." p.196


인물과 관련된 소설을 읽을 때면 이를 더욱 객관적으로 읽어야 할 수밖에 없다. 소설은 소설로서, 사실은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적 인물에 대한 소설은 당사자강 아닌 '작가'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와 '사실'은 엄연히 다르다. 인물에 대한 소설을 읽은 뒤에 그 인물에 대한 조사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것도 '사실'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위함이다.


역사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모든 역사는 '사실'에 기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기록하는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 창작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역사이다. 나혜석에 대한 평가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녀의 작품에 집중하였는지 일생에 집중하였는지, 그녀의 신념을 바라봤는지 그녀의 사랑을 바라봤는지에 따라 그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하지만 어떠한 평가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존재하니, 그것은 그녀가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결투를 신청한 것이다. 그녀의 이름 뒤에 어떠한 수식어가 붙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연하다고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과 맞서고, 다칠 것을 알면서도 세상과 맞짱을 뜨기로 한 그 사실이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전해져 내려온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 평가는 당사자를 제외한 사람들의 의견일 뿐 그녀의 신념이 아니다. 게다가 내 생각이지만 그녀는 평가 따위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세상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세상에는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녀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녀가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글쎄다. 100년 전의 나혜석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지금의 시대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예술, 정치, 철학 등 모든 학문들의 발전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의 의문과 저항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주변에 별나 보이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 별난 사람이 후엔 시대를 앞서 태어난 사람으로 불려 우리 사회를 바꿀지 누가 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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