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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y 30. 2023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예술가

[소설] <달과 6펜스> - 서머싯 몸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 평범한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주말엔 락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되는 나의 지인처럼 말이다. 평소 나의 지인은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성격이지만 음악얘기가 나오면 180도 다른 사람이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와 최근에 들은 흥미로운 음악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얘기하는 그를 보면 역시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세계를 하나씩은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숨겨왔던 나만의 부캐 혹은 또 다른 페르소나라고도 부르곤 한다.


서머싯 몸의 대표작 <달과 6펜스>에서 역시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있는 예술가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뭐랄까 그 정도가 보편적이라고 하기엔 꽤나 심오하다. 자기만의 세계에 너무나도 깊이 빠져 현실의 자아를 잡아먹힌 그의 이름은 '찰스 스트릭랜드'.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화가이다. 소설은 서술자인 '나'가 '찰스 스트릭랜드'와 함께한 경험을 묘사하며 진행된다. 




"나는 그려야 해요" …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p.68


평범한 중산층의 가정에서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던 스트릭랜드는 어는 날 단 한 장의 편지만을 남긴 뒤 가족을 내팽개치고 파리로 떠나게 된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불륜 때문일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그가 전한 말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 지금까지 이뤄왔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화가가 된다는 것이다.


평소 증권가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갑작스러운 그의 말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스트릭랜드는 아내와 두 자녀가 있는 가정의 가장이었다는 사실 역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한몫했다. 주위 사람들의 끈질긴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마치 새로운 영혼이 빙의라도 한 것일까. 금방 그림에 대한 열의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스트릭랜드는 무려 5년간 그림에만 몰두하는 삶을 살게 된다.




무엇인가를 목표 삼고 있긴 했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고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꿈속에서 살고 있었고, 현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p.109


이후에도 그는 가정으로 돌아오지 않고 죽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린다. 그가 왜 갑자기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스트릭랜드 본인조차 왜 그려야 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이유라도 되는 듯한 그의 행동을 주위 사람들은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나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의 행동은 바로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냉철한 그의 태도였는데,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아낌없이 지원해 주는 화가 '스트로브'에게도 일말의 고마움을 느끼지 않았던 점이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을 때 대가 없이 그를 지원을 해주었고, 그가 심한 열병에 걸렸을 때 자신의 집에서 아내와 함께 극진한 간병을 해주었지만 스트릭랜드는 단 한 번도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며 스트로브의 스튜디오를 빼앗고, 그의 가정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이쯤 읽었을 때 나는 확신했다. 스트릭랜드는 더할나위 없는 사회부적응자가 확실하다고.




돈에도 무관심했다. 명성도 안중에 없었다. 우리들 같으면 대체로 세상일에 적당히 타협하고 말지만 그는 그러한 유혹에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그를 칭찬할 수는 없다. 그는 그런 유혹조차 느끼지 못했다. p.221


아무도 그의 그림을 상대해주지 않았고, 또 본인도 누군가에게 그림을 딱히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트릭랜드에게 수입은 없었다. 당연히 명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술자인 '나'의 말처럼 평범한 예술가였더라면 자신의 작품을 대가로 돈을 바라고, 유명해지길 원했을 텐데 스트릭랜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그러한 물질적인 유혹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진정으로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진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소름 끼칠 정도로 자신의 세계에 몰입해서 현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특이한 사람 말이다.


지금껏 수많은 책을 읽어오며 자신만의 철학이 분명한 인물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였고 조언 혹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그들이 만든 세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스트릭랜드의 세계는 이제까지 만나왔던 세계와는 완벽히 달랐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어느 정도 현실을 받아들이며 그 시스템 안에서 저항하거나 기존의 세상을 변화시키지만, 스트릭랜드의 세계는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세계였다. 그의 세계는 자신 외의 세상을 일체 부인하며, 자신의 세계에 부합하지 않다면 잔인하리만큼 냉소적인 취급을 받는다. 아무리 자신만의 세계를 인정하는 나라고해도 이건 지나치게 자신만을 위한 세계가 아닌가. 더는 그의 세상을 응원하기 어려웠다.




나 역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그를 평가한다면 당연히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자신만의 세계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그 세계가 현실에 영향을 끼쳐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그것은 잘못된 세계이다. 철학, 종교, 지식, 예술 등 한 가지에 광적으로 몰입한 사람이 만든 세계는 고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세계에 100% 스며들어 현실과 구분 짓지 못한다면 그 세계는 잘못된 것이 맞다.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이 목숨을 잃더라도 전혀 미동하지 않고 태연하게 살 수 있다면 그를 사회성으로 가득 이루어진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또 그의 세계를 진정으로 존중해줄 수 있을까?


주위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만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나 역시도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보니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주변 사람들의 진심 어린 목소리보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만의 세계라면, 그것이 예술가의 자질이라면 아무래도 나는 예술가가 되지 못할 것 같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숨을 쉬며 살고 있는 곳은 나만의 세계가 아니니까. 앞으로 살아있을 곳 역시 나만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세계임은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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