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하 Jun 05. 2023

죽고 싶은 만큼만 살고 싶었다.

[에세이] <한 말씀만 하소서> - 박완서


언뜻 들은 적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큰 불효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라고. 그 슬픈 감정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식 잃은 부모'를 뜻하는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말도 있다.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에게 죽을 만큼 괴롭다는 말은 어디에 쓰여도 이상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라면 죽을 만큼 괴롭다는 말 외엔 괴로움을 표할 말이 없다. 자식의 죽음은 살아있는 부모의 죽음을 만들어 낸다.


작가 박완서가 쓴 <한 말씀만 하소서>는 그녀가 서두에서 밝힌 대로 소설도 아니고 수필도 아닌 일기다. 누군가 읽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쓴 글이 아닌 아들을 잃은 통곡을 대신한 일기다. 88년 여름날, 작가 박완서는 자신의 아들을 잃었다. 25년 5개월간 세상을 함께 한 아들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꽃다운 청춘의 한 페이지 속에서, 자신이 살아온 세월의 반도 살지 못한 아들을 떠나보낸 그 참담함이 담긴 글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울까. 아무리 굳세게 마음먹어도 페이지를 단번에 넘기기 힘들었다.




내 아들이 죽어도 88올림픽은 열렸다.


내 아들이 없는데도 온 세상이 살판난 것처럼 들떠 있는 올림픽의 축제 분위기가 참을 수 없더니, 내 아들이 없는 세상 차라리 망해버리길 바란 거나 아니었을까. p.47



1988년. 그 해의 여름은 그녀의 아들이 죽은 때이자, 88올림픽이 열린 때이다. 한 개인이 가장 슬픔에 빠질 시기에 온 국민은 가장 기쁨에 취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세상이 미웠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음에도 온 세상이 축제를 즐기는 것에 분노했다. 어떻게 내 아들이 죽었는데 이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신의 아들이 죽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이 세상이야 말로 그녀에겐 진정한 지옥이 아니었을까?


아들이 죽어도 88올림픽이 열린 것처럼, 아들이 죽어도 그녀는 살아있다. 그녀는 아들이 죽었음에도 평소처럼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살아있는 자신의 모습에 역겨움을 느낀다.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 함에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눈을 뜨는 자신을 자책하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자신의 신체와 무의식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부모와 자식 간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단 하나도 그리 되지 않는다. 그래서 때론 가족이라는 끈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신이여, 존재한다면 한 말씀만이라도 해주소서


신, 당신의 존재의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한번도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있는 것처럼 느끼고, 부르고, 매달리게 하는 그 이상하고 음흉한 힘이다. p.130



그녀의 자식을 잃은 분노는 88올림픽의 즐거움에 흠뻑 취한 세상에서 전지전능하다는 신에게로 옮겨진다. 그녀는 가톨릭 신자로서 신을 섬기고 있었고, 수녀님의 도움덕에 가족들과 떨어져 수녀원에서 몇 달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수녀원에서 기도를 하며 그녀는 생각한다. 신이여, 당신은 왜 나의 아들을 이 세상에서 빼앗아간 것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는 아들을 잃는 이 비극을 맞이해야 하는가. 


그녀는 신이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데려갔음에도 신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신을 부정한 순간 자신이 탓할 분노의 대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오직 신만이 죽음을 관장할 수 있다면 오직 신 만이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이 필요했다. 신이 존재해야 자신의 괴로움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녀가 기도를 통해 신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듣고 계시다면 아들의 죽음에 대해 단 한 말씀이라도 해달라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기를 택했다


내 아들이 없는 세상도 사랑할 수가 있다니, 부끄럽지만 구태여 숨기지는 않겠다. p.173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신에 대해 분노해도 그녀는 살아있었다. 시간이라는 약은 당사자가 원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살아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욕해도 그녀는 분명히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다. 살아있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고, 살아있기 때문에 감정을 느낀다. 자신을 부정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들이 죽은 세상에서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물론, 그녀의 고통이 한순간에 치유되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잊었던 기억이 갑작스럽게 떠올라 그녀를 더 큰 고통으로 내몰 수도 있고, 아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비록 이 세상을 떠나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살아있는 모든 순간동안 그녀는 살아남기를 택했다.




자식을 낳아보지도 않은 내가 감히 자식 잃은 슬픔을 느껴보려 한 것에 한껏 죄책감이 밀려왔다. 겪어보지도 못한 고통을 글로 표현해 내려다보니 어색함이 가득해 몇 번이고 글을 수정했다. 그러나 겪어본 고통을 글로 쓰는 것만큼 더 괴로우랴. 글을 쓸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그녀가 죽을 만큼의 고통을 글로 썼다는 사실은 그녀가 죽고 싶은 만큼만 살고 싶었다는 뜻이 아닐까.


지인의 추천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나 역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 진전이 있을 걸 기대하고 어머니께 추천해드리려고 했지만, 책을 다 읽은 후 도저히 어머니께 책을 건넬 수 없었다. 느끼지 않아도 될 고통을 구태여 느끼게 해드리기 싫었다. 자식 잃은 슬픔을 결코 느끼게 하기 싫었다.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 이 책을 찾지 않길 바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예술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