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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Jan 07. 2023

장애의 "종식"을 바라는 세상

[사회] <사이보그가 되다> 서평 - 김초엽, 김원영




과학과 기술의 발전. 보다 편리하고 빠름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존재가 있다. 장애인, 성 소수자, 취약계층 등 규정된 정상(正常)의 잣대에서 벗어나 꾸준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의 방향성을 잃지 않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비정상인"이라고 부르며 보이지 않는 선을 그은다.


김초엽과 김원영이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에서는 장애인이 바라본 "장애"와 비장애인이 바라본 "장애"의 관념을 비교하며 우리가 그간 장애인을 어떤 집단으로 규정했는지 말한다.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신체에 더해진 보조기구들을 직접 착용하고 스스로를 "사이보그"라고 부르며 사이보그가 된 과정과 그 결과를 사회의 인지적 차원에서 풀어 쓴다. 무의식적으로 장애를 "종식"시키고, 장애인을 "치료"하려고 노력한 사회와 시선을 비판하며 장애인의 시각으로 장애를 설명한다.


정상(正常)으로서의 강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듣지 못했던 소리와 마주하고, 걷지 못했던 곳에 다가선다. 보청기와 휠체어 뿐 아니라 색맹안경, 의수 등 수십가지의 발명품을 통해 장애인들은 정상인의 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를 본 사람들은 곧 장애인 역시 차별 없는 세상에서 비장애인과 함께 행복할 수 있다고 꿈 꾼다.


그러나 행복이 가득해보이는 그 세상은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세상이다. 비장애인들은 장애를 "질병"으로 여기고 이를 치료해야 한다고 말하며, 인류는 장애를 극복하여 온전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정상(正常)의 목표를 삼는다. 그 예로 청각장애인에게 "목소리"를 선물한 KT의 기가지니 광고에서 사람들은 청각장애인이 소리를 듣는 장면을 보고 "감동적이다", "따듯하다"라고 말하고, 휠체어에서 일어나 결국 땅을 밟고 "걸어내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었다" "장애를 극복하였다"라고 말한다. 비장애인들의 시각에서 "장애"를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보고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동일한 신체적 능력을 가졌을 때 비로소 장애인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은 정말로 자신의 장애를 치료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할까? 장애의 치료에만 집중하는 것이 진정한 장애의 종식일까?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 미래에는 장애가 해결될 것이라는 '약속의 과학'에 현대인들은 계속해서 개발에 투자하고 있지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그것은 '낙관적인 미래론'일 뿐이며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동아줄에 올라타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말하는 "언젠가"의 유토피아를 마주하기 위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것에 지친 장애인들은 더 이상 장애의 "종식"에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화려한 축제와 "그림의 떡"


4차 산업시대와 인공지능. 우리는 그야말로 혁명과도 같은 과도기를 마주했다. 어제의 것은 이미 시시한 것이 되었으며 1년 전의 기술은 낡아 빠진 것이 되었다. 빠름과 편리함의 가치는 이미 인간의 본연적인 가치를 넘어섰고, 기술적 진보와 산업적 혁명에 시야를 좁히고 있다. 이렇듯 과학기술의 화려함과 눈부신 성장에 매혹되어 기술적 향상만을 추구하는 것을 '테크노 페티시즘'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화려한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자축하는 사람들을 보며 새로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곤 한다.


자신이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발명된 '보이지 않는 보청기'는 약 500만원에 가까운 가격이고, 휠체어를 타는 대신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의족은 대략 1만 5000천달러에 가깝다고 한다. 물론 성능에 따라 가격이 다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장애인들은 '정상'으로 보이기 위해 돈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장애인들이 마주치는 문제는 재정적인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신체와 맞다는 기기는 가려움증과 염증 등 다양한 신체적 고통을 수반하고, 수시로 청소하고 관리하는 등 유지보수에 힘을 써야한다. 정상인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비단 장애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대중의 편리를 위해 발면된 '키오스크'는 특정인들에게 또다른 불편을 야기하여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하였고,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또다시 경쟁에서 뒤쳐진다. 누군가의 편리함은 누군가에게 불편함으로 다가오지만 빠름과 편리함에 가치에 집중한 나머지 소수의 의견을 무시한 꼴이다. 수천만원의 장애보조기구와 초속의 디지털 서비스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어쩌면 이것은 더욱 더 향상된 기술만을 꿈꾸는 특정인들의 축제가 아닐까? 정작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들의 손에 손쉽게 들어올지 의문이다. 누리지 못하는 21세기 "그림의 떡"이다.


우리가 시선을 맞춰야 할 것은


과학기술과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지금껏 누리지 못한 생활수준과 편리한 삶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문자통역과 AI챗봇등 우리의 상상은 현실이되고 불가능의 영역은 점차 좁아진다. 하지만, 이렇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연 이 고속행진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우리의 목표는 무엇이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말이다. 더욱 더 앞으로, 남들보다 위로 올라가는 것에 온 신경을 쏟아 부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급급하지 말고, 어떠한 방향으로, 누구를 위한 방식으로 문제를 "이해"할지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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