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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Jan 10. 2023

세상의 준회원으로 산다는 것

[소설] <죽은 시인의 사회> 서평 - N.H.클라인바움



인생의 목표가 획일화되어 나의 꿈이 곧 너의 꿈이 되고, 너의 꿈은 나로 인해 묵살된 순간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심장과 뇌가 몸속에서 빠져나오고 그 자리에 규칙적인 바이탈을 내뿜는 금속부품들이 그들의 자리를 빼앗는다. 흔한 표현인 "살아있는 시체" "인격 없는 로봇"의 경각심을 무심코 넘기지만 이미 우리 대부분은 로봇과 시체가 되었다. 수능과 취업, 출퇴근과 퇴직의 단어는 우리의 일상에 깊숙하게 박힌 채 시야를 좁히고 불안감을 형성하며 자신의 몸집을 키우고 있다. 마치 다른 것에 관심을 두면 인생이 망할 것이라고 말하는 듯이 떵떵거리며 자기 몸을 쩌억 늘린다.


저항과 혁명, 투쟁과 쟁취 등의 단어가 왜 가치 있게 인정받고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수백수천 명의 사람이 맞다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의 집약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가지만 "이게 왜?"라고 스스로 물으며 잠들어있는 대뇌에 "생각"의 주사를 투여하는 것. 따가운 시선과 냉소적인 웃음을 무릅쓰며 책상을 밟아 오른 뒤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자신을 찾아가며 죽은 사회에서 "생각"을 찾아 떠나는 이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를 만들어 세상과 저항한다. 아이비리그 만을 바라보는 세상에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아낸 뒤 결국 스스로를 바라본다.


"장미꽃 봉오리를 따려면 지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장면 中


소설 속 웰튼 고등학교는 평균 학생의 70% 이상이 아이비리그에 진학하는 소위 "명문 고등학교"이다. 아이비리그는 미국의 상위 8대 대학으로, 초창기에는 대학 미식축구 리그였지만 현재는 대한민국의 상위 10대 대학처럼 대학 서열화의 근간이 되는 단어이다. 웰튼 고등학교의 수업은 끊임없는 주입식 교육과 획일화된 커리큘럼의 수업으로 이루어진다. 학생들의 목표는 학교와 학부모가 정했고, 그 목표는 당연 "아이비리그 진학"이다. 이 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를 소설로 재구성한 것인데, 대략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모두가 달리는 상황은 비슷한 걸 보니 현재에 와서도 이 작품이 인기가 있는 것이 이해되면서도 씁쓸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등학교 2학년으로 한국 나이 약 18세다. 한창 호기심이 강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갈 중요한 시기 속에서 그들의 부모님, 혹은 선생님들은 꿈과 낭만을 무시한 채 규율과 목표만을 추구한다. 사람에게 로봇의 전력을 주입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웰튼 고등학교의 졸업생이자 새로 부임한 국어선생님인 "키팅"은 달랐다. 그의 수업방식은 굉장히 파격적이고 혁신적이었으며 지금까지의 웰튼을 뒤흔들기 충분했다. 그는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과 달리 학생들에게 지혜를 가르치며 학생들의 마음에 '카르페디엠'이라는 씨앗을 심어준다.


"대부분 지난 세월을 아쉬워하며 세상을 떠나 무덤 속으로 사라져 갔을 것이다 ... 능력이, 시간이 없어서 그랬을까? 천만에! 그들은 성공이라는 전지전능한 신을 뒤좇는 데 급급해서, 소년 시절 품었던 꿈을 헛되이 써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지금은 땅 속에서 수선화의 비료 신세로 떨어지고 만 것이지.

<죽은 시인의 사회 中>


성공은 전지전능하다. 성공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은 각자의 '카르페디엠'을 포기하고 세상에 굴복한다. 꿈을 포기하고 현실로 시선을 돌리며 나의 인생을 정당화시킨다. 그리곤 자신의 끈을 스스로 놓아버린다. 세상의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춘 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궤도에 나를 맡긴다. 누구의 성공인지도 모르는 그 성공 속에서 말이다. 하지만 규정된 성공에서 자신만의 씨앗을 찾아 꽃봉오리를 키워내는 것. 그것이 키팅 선생의 교훈이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오늘을 즐겨라!" 근데... 어떻게요?


이미지 출처: 뉴스 미디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으라. 그리고 그것에 미쳐라." 이 책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세지 중 하나이자 우리 모두가 조언하고 또 조언 듣는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찾고, 어떻게 즐겨야 하는 것인가? 이 작품이 다른 책과 달리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독자에게 약간의 힌트를 제공한 것에 있다. 그것은 바로 "책을 읽지 않고 책을 분석하는 방법"(p.233)인데 나는 이를 "현실에 적응하면서도 꿈을 잃지 않는 방법"으로 해석했다. 오늘을 즐기기 위하여 현실을 완전하게 배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법"을 따라야 한다. 싫어하는 사람과 밥을 먹으며 대화를 해야 하고, 끔찍한 상황에서 무작정 도망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세지는 아마 무조건적으로 "순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현실에 안주하고 흐르는 물속에 자신을 던져 떠내려가는 것만이 아닌 자신의 물길을 찾아 그것에 몸을 던지고 저항하듯 헤엄치며 스스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 오늘을 즐기는 "카르페디엠"일 것이다. 오늘을 즐기기 위한 마음속의 불안감, 수천 개의 눈동자, 사회의 톱니바퀴를 이겨내는 것은 당연 쉽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의 길을 개척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 무리에서 벗어났으니 그 위험은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것.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오늘을 즐기지 못한다.


오늘을 즐기는 것은 각자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누군가 그것을 알려준 순간 그 "즐김"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카르페디엠"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리는 것 또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오늘을 즐기느냐, 오늘을 맡기느냐의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자유와 책임. 떼어놓을 수 없는 아이러니한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균형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선장 "키팅"은 뿌듯하게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왼손으로 밥을 먹을 수 있기에 우리는 살아있다.


"왜 모두 왼손으로 밥을 먹고 있는겐가?"
"오래된 습관을 한 번 바꿔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서죠."
 "그래? 오래된 습관이 뭐가 나쁘지?"
 "그건 기계적인 생활을 되풀이하는 것이거든요. 사고력도 제한하고 말이에요..."

<죽은 시인의 사회 中>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장면 中


개인의 개성은 곧 사회의 분열이다. 밥을 왼손으로 먹는 것은 관념에 대한 도전이다. 일방적인 통행으로 순탄한 도로에 역으로 주행하는 차가 출몰한 것과 같다. 정형화된 틀이 깨지고 안정감이 사라지면 마음은 불안하고 몸은 움츠려든다. 변화는 불안을 만들어내어 걱정을 키우고 걱정은 또다시 고민을 증폭시킨다. 악순환이라면 악순환이라고 불릴 수 있는 부정적 기류다. 물론 사람의 관점에서 말이다.


로봇은 불안하지 않다. 감정이 없기 때문에 실수와 실패를 겪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넘어져도 아무 상처 없다.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서 다시 빙빙 돌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감정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가? 조금의 실수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실패의 상처는 깊이 박혀 치유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누군가의 시선과 평가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걱정과 고민, 불안은 삼각형을 그리며 끝없이 순환한다. 왼손으로 밥을 먹는 것은 눈에 띄는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유를 설명하려 든다. 결혼을 하지 않고, 학교를 그만두고, 동성을 좋아하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획일화된 규칙을 만들 수 있으면서 그것을 분열시킬 수 있다. 불완전한 생명체가 지닌 한계이자 축복인 것이다.


우리의 선장이자 선생인 "키팅"은 "획일성"을 기피하라고 한다. 그 말은 곧 누군가 오른손으로 밥을 먹으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무작정 오른손으로 밥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마음속 주머니에 항상 "물음표"를 가지고 다니며 세상의 흐름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로봇인가? 혹은 인간인가?" "오늘을 즐기기 위해서 내가 저항해야 할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마치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늘을 즐겨라"고 하는 낙관적인 책만은 아니다. 사회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서 사회에서 살아나가는 방법. 생각의 흐름을 제어하는 세상에서 동력을 찾아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자극적이고 시끄러운 소음을 멀리하고 나의 소리에 집중하여 흐름을 찾는 일. 찰나의 흐름을 잡아챌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성공이다. "로봇들의 사회"와 "죽은 시인의 사회"의 중간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며 스스로의 균형을 찾아내는 일. 정회원의 안정감과 나태함을 멀리하고 준회원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오늘을 즐기는 가장 현명한 방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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