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나의 이사이야기 선인장 대습격>
아침으로 토스트를 먹으며 오랜만에 티비를 켰다. 원래라면 채널을 위로 돌리며 예능이나 뉴스를 대충 둘러보고 금방 티비를 껐겠지만 티비앞에 앉은 지 너무 오래되었나, 나도 모르게 아래쪽 화살표를 눌러버렸다. 채널은 1에서 훌쩍 세 자릿수로 넘어갔고, 반가운 감자머리 짱구를 만났다. 티비로 짱구를 본 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내게 익숙한 평평한 얼굴의 짱구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피부가 매끈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짱구가 화면 속에서 부리부리 춤을 추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려 했지만 어느새 나는 눈물을 흘리거나 깔깔대며 웃고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영화의 엔딩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록 아침으로 먹으려 했던 토스트는 눅눅해졌지만 추억으로 가득 찬 포만감 덕분에 평소보다 더 기운이 났다. 추억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나의 이사이야기 선인장 대습격>은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시리즈의 23번째 영화로 2016년에 개봉된 애니메이션 영화다. 집계된 수익은 약 22.9억 엔으로 역대 극장판 1위를 달성했다. 러닝타임은 106분으로 아동 애니메이션답게 가볍게 보기 좋다. 20년이 훌쩍 넘은 만화임에도 여전히 짱구라는 캐릭터가 건재하고, 매년 새로운 애니메이션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참 놀랍다.
이 영화는 갈등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갈등으로 가득하고, 갈등으로부터 이야기가 진행된다. 영화 초반부 주인공 짱구의 아빠 "신형만"은 회사로부터 승진을 전제로 한 멕시코 발령을 전달받았고, 타국의 기러기아빠가 된다는 것에 내적으로 갈등한다. 이후 짱구의 엄마 "봉미선"과 출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한번 외적으로 갈등하지만, 결국 가족 모두가 멕시코로 떠나는 결정을 한다. 신형만의 결정과 이로 인한 가정의 갈등이 현실에서도 많이 일어나는 일이라 마냥 웃으면서 이 장면을 보지 못했다.
짱구 역시 이사로 인한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짱구가 멕시코로 떠난다는 소식에 짱구의 떡잎마을 친구 "철수"는 섭섭한 감정을 숨기고 짱구와 일부러 거리를 둔다. 멕시코로 떠나는 당일, 결국 철수는 짱구를 배웅하지 않았고 짱구는 철수가 없다는 사실에 내심 서운한 마음을 내비친다. 그러나 짱구네 가족이 기차를 타고 공항에 가는 도중 철수는 떡잎마을 방범대 표식이 달린 베지를 흔들며 기차를 향해 뛰어가고 짱구 역시 철수를 발견한 뒤 베지를 흔들며 애절한 작별인사를 한다. 사소한 갈등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5살짜리 아이에게 이별이란 감정은 익숙하지 않을 터. 말하지 않아도 벳지를 흔들며 서로 이별을 받아들이는 그 모습이 참으로 뭉클했다.
영화는 짱구네 가족이 멕시코에 도착하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짱구네 가족의 예상과 달리 멕시코의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였고, 신형만의 업무 역시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러던 중 마을에서 열린 선인장 축제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선인장들이 사람을 먹기 시작했고, 짱구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은 식인 선인장으로부터 도망친다.
그 과정 속에서 인물들의 갈등은 계속된다. 자칭 마을의 프로레슬링 선수지만 겁이 많은 “거비마나 로드리게스”(네네 로드리게스)는 모두에게 힘이 필요한 순간마다 무릎이 아프다며 꾀병을 부리고, 마을의 촌장인 “머리가요 크다요레스”(즈야카오 에라이)는 사람들이 선인장으로부터 잡아먹혀도 마을의 존속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며 식인선인장의 문제를 외면한다. 이러한 과정은 인물들 간의 외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사자성어에 걸맞게 인물들의 갈등은 갈등으로 인해 해소된다. “식인 선인장의 퇴치”라는 하나의 목표로 뭉친 인물들은 내적갈등으로 인한 성장과 끈끈한 연대를 통해 갈등을 해결한다. 프로레슬러 선수인 거비마나 로드리게스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두려움에 맞서 싸우기로 스스로 다짐하는데, 영화 후반부엔 자진해서 선인장을 유인하고 가시에 찔려도 개의치 않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겁이 많아 매번 시합에서 도망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매일 핑계를 대던 그가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용기를 낸 것이다.
“모두라니요? 마을엔 이미 아무도 없는데요? “ - (짱구가 촌장에게)
촌장 역시 내적 갈등으로부터 연대를 이뤄낸 인물 중 하나이다.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촌동네 취급을 받는 마을(머꼬또머고블라)의 부흥은 그에게 있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영화 내내 촌장이 열매에 대한 집착을 보이며 그룹을 위험에 빠뜨린 것도 열매가 없으면 사람들이 다시 이 마을을 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선인장의 식인으로 인해 마을의 사람들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고, 촌장은 마을을 이루는 것은 선인장이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촌장은 자신의 전부와도 같다고 생각한 마을을 훼손하고, 직접 파괴하며 식인 선인장과 대적한다.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자신의 신념까지 포기한 셈이다.
이 영화에는 악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의 발전만을 추구하는 촌장은 악인이 아니며, 한량처럼 노래하는 "느끼아노 산체스"(마리아치)와 세상에 무신경한 채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프란시스카"도 그룹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으므로 악인이 아니다. 식인 선인장의 식인 행위 역시 스스로 꽃을 피우기 위해 양분을 섭취하는 것일 뿐이므로 악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 이 영화는 악역이 없음에도 악을 퇴치하는 영화다. 그 악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모습과 외면했던 문제들,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들이다.
영화는 주인공 짱구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힘으로 식인 선인장을 물리치며 막을 내린다. 주인공 짱구가 혼자서 이뤄낸 것이 아닌 모두가 이뤄낸 결과물이다. 이후 엔딩곡에서 마을이 다시 평화를 되찾고, 모든 이들이 함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자 한 사람의 거대한 행복보다 여러 사람의 작은 행복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화 속 촌장이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마을 사람들의 행복을 선택한 것처럼 현실 속 우리 사회도 한 개인이 아닌 다수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연대의 행복을 혼자서 맛보기란 불가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