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목은산이 어디에 있는 산이예요?"
목은산에 간다고 집을 나서는 엄마에게 딸이 묻는다.
여고 동창생들과 매주 목요일마다 만나서 걷기 시작한 지 어언 십 년이 된다.
그 걷기 모임 이름이 목은산회이다.
나는 십여 년 전에 삼십 년 이상 다니던 직장에서 은퇴하고 이른바 노후의 길로 들어섰다.
내가 퇴직할 무렵 사람들은 묻곤 했다.
직장 그만둔 후에는 뭘 할 거냐고.
특히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
딸은 내가 아무런 계획도 없고 그냥 자유롭게 살겠다고 하니 은근히 걱정도 되고 부담이 되었나 보다. 엄마가 심심하다고 시도 때도 없이 저한테 전화해서 놀아달라고 보챌까 봐서였을까?
어쨌거나 퇴직 후 얼마동안은 자유를 만끽했다.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을 다시 찾아 마감기간 정하지 않고 시간 되는대로 하루에 조금씩 번역하기도 했고 사람들도 만나고 운동이 부족하다 생각되면 동네 주변으로 산책 다니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가 사는 아파트 주위에 산이 여럿 있다.
우선 집 앞의 매봉산, 그 옆에 금호산이 있고 그리고 남산까지도 집에서부터 쉽게 걸어갈 수 있으니 하루 종일 혼자 걸어도 심심한 줄 몰랐다.
그리고 중구는 서울의 구도심이 가까워서 역사적 도시 서울의 옛 흔적을 찾아다니며 걷는 재미도 있었다.
근처에서 남산과 낙산의 한양도성 성곽길을 비롯해서 광희문, 혜화문, 동묘 등등 서울에 살면서도 몰랐던 역사적인 장소를 새로 발견하고 좋아했다.
그렇게 일 년쯤 보내고 난 후 조금 심심해지려고 할 때, 여름이 끝나가는 어느 날 여고동창회의 임원인 한 친구가 전화를 해서 동창회에서 가을소풍 가는데 참가하겠느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예전에 한 반 했던 친구였으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터여서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소풍 갈 곳은 천리포 수목원과 신두리 사구라고 했다. 두 군데 모두 가보지 않은 곳이라 즉시 참가 신청을 했다. 그런데 이 소풍이 나로 하여금 여고동창회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동안 직장생활 때문에 동창회 모임에는 거의 나가지 못했고 참여하는 동창회 소모임도 없었다. 해외여행도 몇 차례 있었으나 참가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난생처음 참가하는 동창회 소풍날 몇십 년 만에 만난 이제는 꽤 나이 들어 70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된 친구들이 어디로 갈지 몰라 쭈뼛거리는 나를 보고 "라니야, 이리 와!" 하고 어린아이들처럼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해 주니 여간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여고동창회가 노년의 좋은 놀이마당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날 소풍에서 받은 즐거운 감동은 이미 글로 써서 동창회보에 올리기도 했다.
어쨌든 그다음 해부터는 적극적으로 동창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기회 있으면 모임에도 자주 나가기 시작했고 동창회에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할 수 있는 만큼 돕기도 했다.
그러면서 산책모임도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이미 50년 가까이 지속된 동기동창회에는 소모임도 많고 벌써 20년 된 등산모임도 있었다.
내가 처음에 동창회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며 들어가 보고 싶은 소모임을 찾아보았을 때는 컴퓨터반, 라인댄스반, 고전무용반, 영상모임, 골프모임 그리고 등산모임이 있었다.
그 외에는 거주지 중심으로 모인 소모임도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등산모임에 관심이 갔다. 대학시절에 등산을 열심히 다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등산모임의 활동을 자세히 보니 설악산등반이니 지리산종주니 하며 거창한 산으로 산행했다는 기록과 사진이 보이고 서울 주변에서도 다닌다는 산이 완만한? 청계산도 아니고 바위가 많고 산길이 험한 북한산이나 도봉산에서 하루에 너덧시간을 걷는다고 했다.
나는 그 당시(십 년 전) 청계산 중턱의 진달래능선까지만 가도 숨이 차고 힘들어서 감히 등산반 출신이란 말도 못 할 정도였는데.
아무래도 이 등산모임에는 못 들어가겠다 생각하고 포기하려는 즈음에 몇몇 친구들이 목요일마다 만나서 공원이나 둘레길을 가볍게 걷자고 모임을 제안했다. 그리고 모임 이름을 목은산 (‘목요일은 산’이라는 뜻) 회라고 하고.
나는 물론 이 제안에 찬성했을 뿐 아니라 길잡이까지 하겠다고 자청했다. 때마침 제주의 올레길에서 시작하여 서울둘레길을 비롯해서 전국적으로 둘레길, 자락길이 열리면서 건강한 삶을 위해 온 국민 사이에서 걷기 열풍이 일어날 때였다. 반갑게도 둘레길뿐만 아니라 서울 주변 도처에 공원이나 수목원도 새로 많이 생겨서 매주 새로운 곳을 찾아갈 수 있었다.
우선 서울의 중심인 남산의 산책길부터 시작했다. 당시에 동기회장을 맡고 있던 친구와 단둘이 남산의 북측순환도로를 걸었는데 때마침 단풍으로 물든 남산과 낙엽이 깔린 운치 있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길은 회장의 맘에 들었고 그날은 목은산모임의 시작이 되었다.
그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걷기가 진행되어, 은행나무길이 아름다운 현충원, 억새가 하얗게 핀 하늘공원, 눈 내리는 서울숲과 올림픽 공원으로 산책은 계속되었다. 공원뿐만 아니라 고궁도 있었다.
서울에 오래 살면서도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여러 고궁과 공원들을 거닐며 새로운 눈으로 서울을 보게 되었다. 또 서울에는 산과 하천이 많아서 동네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꽃길과 산책길을 만들어 놓아 걸을 곳도 많아졌다. 정보도 많아지고. 그 당시 서울시에서 막 발간한 책자 '서울테마산책길'은 우리가 산책코스를 정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눈이나 비가 많이 오거나 너무 춥거나 너무 더워서 야외에서 걷기 힘들 때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아 실내에서 걷기도 했다.
우리는 보통 오전 11시에 지하철역 출구에서 만나서 두 시간쯤 (만이 삼천보쯤) 느릿느릿 걷고 그 후 두 시간은 점심 먹고 차 마시는 시간으로 보낸다. 그러니 우리 친구들은 만나서 걸으면서 다리 운동뿐 아니라 입 운동도 열심히 하는 것이다. 너무 이야기에 몰두하는 바람에 앞사람을 놓치고 길을 놓칠 때도 있지만. 어쨌든 목요일 하루의 네 시간은 모두가 즐겁게 지내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목은산회의 하루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집에 돌아가서 단체카톡방을 열어보면 그날 찍은 멋진 사진들이 줄줄이 올라온다. 목은산친구들은 어쩌면 그렇게 모두 사진들을 잘 찍는지! 전부 사진작가들 같다.
멋진 풍경과 즐거워하는 표정의 인물들 사진전시회를 랜선 갤러리에서 보는 느낌이다.
그런데 또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걷는 현장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목은산 친구들이 어디로 다니는지 또 누가 갔는지 목요일이면 궁금해하며 소식과 사진을 기다리는 톡방 친구들도 많다. (매주 참가하는 친구들은 10-20명 정도이지만 톡방에서 관심 가지는 친구들은 120명이나 된다) 이 친구들은 집에 앉아서 톡방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고 감탄도 하고 격려도 해주며 따뜻하고 다정한 응원의 댓글을 올려준다. 그 댓글들은 평론가의 촌평이나 시인의 시구처럼 정말 멋지고 아름답다!
저녁때면 이렇게 멋진 댓글이 톡방에 올라와야 비로소 오늘의 목은산모임이 잘 마무리되었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이 들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다. 외국에 사는 친구들도 목은산 톡방에 들어와서 인사하며 고국에 올 때마다 목은산에 오고 싶어 하고 또 참가한다. 사진에 자주 보이던 친구가 결석하면 그 친구의 안부를 묻기도 하며.
이렇게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 모임이 소문? 이 나서 몇몇 아는 사람들은 여태까지 다닌곳을 책으로 내보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산책길에 관한 정보지는 이미 많이 나와있으니 나까지 쓸 것은 없다면서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 코로나 시절에, 딸이 자신도 나이 들어가면서 노년여성의 삶이 궁금해졌나 보다.
엄마와 엄마친구들의 산책모임에 대해 책을 쓰겠다면서 나에게 자료 요청을 했다. 그런데 내게는 최소한의 기본자료 밖에 없으니 자료가 너무 부족했다. 앨범에 그동안에 찍은 사진은 많이 있지만(그것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최소한의 기록(날자, 행선지와 참가자 정도)밖에 없으니 좀 더 상세하게 기록을 해놓지 못한 내 자신의 게으름이 드러나서 한편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우리 모녀는 서로 자주 만나지도 못하니 구술로 일일이 전달할 수도 없어 딸의 “엄마의 산책”의 진도는 그가 원하는 대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전부는 아니어도 최근에 다녀온 곳에 대해서라도 보고서를 써 보내주기로 했다.
지난봄부터 매주 목은산회 후기를 일기숙제처럼 써 보내면 딸이 편집해 주기로 하고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매거진에 글이 어느새 50 편이 모였고 어느덧 우리 목은산 모임은 올해 탄생 10주년을 맞게 되었다.
나는 이런 특별한 기회를 맞아 사랑하는 목은산회 친구들에게 이 "엄마의 산책" 매거진을 선물하고 싶었다. 우선 10년 동안 함께 즐겁게 걸어준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단톡방에서 서로 격려하고 응원해 주는 친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그리고 또 목은산회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져주고 응원해 주는 내 딸(엄마에게 “산책디자이너”라는 직함? 도 주었다)을 비롯해서 모든 친구의 가족들(모두 명예회원이다)에게도 감사한다.
'효부'에서 시작하여 ‘현모'와 '양처' 뿐 아니라, '조모' 노릇까지 충실하게 하며 열심히 평생을 살아온 엄마들이 이제는 친구들 만나 즐거운 노년을 보내시라고 엄마를 지지하고 박수 쳐주는 가족들에게 말이다.
내 어머니는 올해 우리 나이로 백세이신데 매주 일요일 팔십을 바라보는 딸이 뵈러 갈 때마다 지난 목요일에 어디에 다녀왔는지 꼭 물어봐 주시고 어디 어디 갔다 왔다고 말씀드리면 잘했다고 칭찬하고 거기 좋지? 하시고 지난날을 회상하며 대리 만족하시는 것도 같다. 어떤 날은 "지난 목요일에 비 왔는데 그날도 걸었니?" 하시며 관심을 보이시고 또 헤어질 때는 일주일 동안 친구들하고 잘 놀다 오라고 응원해 주신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사랑하는 목은산 친구 여러분, 우리 모두 아프지 말고 건강해서 앞으로도 오래오래 함께 걸읍시다!
지난 십 년 동안 같이 걷고 즐겁게 놀아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