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디자이너 라니씨가 추천하는 10월의 산책코스
망우 역사문화공원?
서울에서 오래 살았던 세대는 망우리 공동묘지라고 말하면 금방 알아들을 것이다.
조선의 이태조가 구리 건원릉(동구릉)에 자신의 능 터를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서 쉬면서 좋은 땅을 얻었으니 이제는 근심을 잊겠다고 말하여 이때부터 망우리忘憂里 라는 멋진 마을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망우리는 1933년부터 일제에 의해 공동묘지가 되어 1973년까지 운영되었고 그 이후에는 매장이 중지되었다(내 외할아버지도 그전에 이곳에다 묘터를 잡아 놓으셨다는데 1974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기에 묻히지 못하셨다고 들었다).
그 이후 이 지역은 애국지사와 문화예술계 유명인사들의 묘역만 남고 다른 묘들은 대다수 다른 곳으로 이장되고 정비되어 오랫동안 묘지공원 역할을 하였다.
그동안 이곳 지명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시작해서 망우 묘지공원, 망우리공원을 거쳐 최종적으로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묘지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는 연고자가 아닌 경우에는 보통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게 되지 않으므로 중랑구는 일반인들도 끌어들이기 위해 전략적으로 '묘지'를 '역사문화'로 바꾼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름이 좀 길기는 해도 좋은 발상에서 시작한 것 같다.
오늘 우리는 이 역사적인 망우공원으로 가기 위해 망우산을 향한다.
원래 망우산은 서울둘레길 2코스에 있고 용마산, 아차산과 연결되어 있다.
처음에 우리 모임이 산책을 시작했을 때는 서울둘레길 완주라는 꿈도 꾸어 본 적도 있다. 그러나 코스 하나가 너무 길고 시끄러운 차도 옆을 오래 걸어야 하는 경우도 많아서 완주의 꿈은 포기하고 중간에 올라가 편한 길로 둘레길의 일부분 걷다가 내려오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미 아차산과 용마산의 자락길은 걸어볼 수 있었으나 사색의 숲길이 좋다는 망우산에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작년 팬데믹 시절에 내가 혼자서 중랑캠핑숲까지 찾아가 걷다가 캠핑숲이 끝나는 곳에서 건너편에 망우역사문화공원 표지판을 보기는 했으나 이미 해 질 녘이라 더 가지 못하고 돌아오면서도 궁금해서 언젠가 친구들하고 와야지, 하고 마음에 담아두었다.
망우 역사문화공원에 가려면 경의중앙선 양원역에서 내리면 된다. 10월 말까지 셔틀버스도 운행한다지만 우리는 걷기가 목적이니 우선 걸어가기로 한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늘 비가 온다고 하였기 때문에 참가자가 적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열두 명이나 모였다. 우리가 만날 때는 비가 보슬비로 약해지고 있었다.
역 앞으로 나오니 대각선으로 왼쪽 건너편에 중랑캠핑숲과 공원이 보인다.
이 공원은 캠핑장 옆에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공원시설이나 숲길이 잘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은 비가 온 탓인지 사람도 없고 조용하다.
울창한 숲길 곳곳에 서울둘레길을 표시하는 주황색 리본이 나무에 매달려 있어 길 찾기가 쉽다. 둘레길 리본을 따라서 한적하고 운치 있는 숲을 가로질러 가니 망우역사문화공원 입구가 보이고 그리 건너가는 육교가 있다. 건너편에 망우산이 있다.
입구에서부터 완만한 오르막길을 계속 오르다 보니 얼마 가지 않아 길옆 전망 좋은 곳에 특별한 건물이 보인다. "중랑망우공간"이라고 작년에 개관했다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역사와 문화가 함께 하는 자연이라는 구상에서 출발하여 세워진 교육전시관과 체험관 그리고 카페로 이루어져 있는 건물이다.
단체로 탐방하는 학생들이 있다.
교육전시관 입구 옆 벽면에는 이 역사문화공원에 잠들고 계시는 한국근대사의 유명인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이 붙어있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하여 한용운, 방정환, 박인환, 이중섭 등등 교과서에서 본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 보인다.
그런데 뜻밖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분의 성함을 보고 모두 놀라고 반가워한다. 60여 년 전 우리가 중학교 다닐 때의 박은혜 교장선생님이시다. 멀지 않은 곳에 사진까지 있어 웃으시는 모습도 뵐 수 있는데 이곳에 계신 줄 여태 모르고 있었던 것이 한편으로는 좀 죄송한 마음이 든다.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열리던 운동장 조회에서 그분이 우리들에게 어려운 시험을 치르고 뽑혀서 입학한 귀한 학생들이라고 자부심과 자존심을 키워주고 "진선미"라는 교훈대로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 사는 삶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훈시하시던 기억이 나서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 운동장 조회는 사계절 중단되는 일이 없어서 우리는 추운 겨울에 외투도 못 입고 발이 시려서 언발을 동동 굴렀고 더운 여름에는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하고 빈혈로 쓰러지는 학생들이 간혹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이 추모공원에 모셔진 분들의 묘소를 몇 군데라도 찾아다니며 참배하면 좋겠지만 너무 넓은 곳이고 예정된 일정도 아니어서 시간적으로 어려울 것 같아 가까운 곳에서 유관순 열사 합장묘를 발견하여 대표로 그곳에서만 묵념하며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의 안식을 기원하고 떠난다. 그리고는 산자락으로 이어진 숲길을 계속 좀 더 걷다가 사잇길 분기점이라고 쓰여있는 이정표를 반환점으로 되돌아선다.
새벽에 내린 비에 떨어진 낙엽이 길에 깔렸으나 나무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들은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다.
전망 좋은 중랑망우공간의 망우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지만 시간도 맞지 않은 데다 마침 양원역으로 가는 셔틀버스가 카페 앞에 대기하고 있다. "견물생심"이랄까? 친구들은 버스(무료셔틀버스)를 보더니 걷지 않고 타고 내려가고 싶은 눈치이다.
비가 온 다음이라 젖은 낙엽으로 내려가는 길이 미끄러울 것 같기도 해서 버스를 타기로 한다.
양원역에서 셔틀버스를 내려 근처 식당을 찾아간다. 오늘은 친구 M. 이 자신의 딸이 큰 상을 받았는데 엄마친구들이 축하해 주니 고맙다고, 또한 친구 J. 는 대상포진에서 회복되어 다시 나와 걸을 수 있어 기쁘다고 하며 M. 은 점심으로 또 J. 는 후식으로 한턱내겠다고 한다. 함께 한 친구들은 사양하지 않으며 모두 행복해 보인다.
오늘은 망우산에서 어릴 적 친구들이 뜻밖에 60여 년 전 여중생 시절에 함께 뵈었던 교장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또 현재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 두배로 만들며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한다.
2023년 10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