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현 Nov 26. 2023

남산 단풍길

산책 디자이너 라니씨가 추천하는 11월의 산책코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날씨가 어둡고 심상치 않다. 일기 예보에 의하면 비는 오후부터 온다고 했는데 이른 아침부터 창밖으로는 벌써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보인다.


오늘은 남산 공원을 걷기로 한다. 그런데 엊저녁까지만 해도 같이 걷겠다고 신청하는 친구들이 몇 안 되어서 오늘은 아주 호젓한 팀이 되어 걷나 보다 했는데 웬걸 아침 8시가 지나자 하나 둘 더  추가되더니 모두 10 명이나 된다. 아니 비도 온다는데..?  못 말리는 70대의 낭만 소녀들은 가을비 우산 속에서 낙엽을 밟으며 나란히 걷고 싶었나 보다.


남산공원에 갈 때 우리가 주로 만나는 곳은 충무로역이나 동대입구역  그리고 가끔 한강진역에서도 만난다. 오늘은 동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만나 출발하기로 한다. 이 길은 장충체육관을 지나 신라호텔 뒤편으로 해서 한양도성길로 연결된다. 6번 출구에서 출발하면 장충단공원을  통과하여  남산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오늘은 한양도성길의 성곽 안쪽 내부순성길을 따라 걷는다. 성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동네는 약수동이다. 도성길의 초입 부분에는 약간의 경사가 있어 계단이 좀 있으나  구불구불한 오래된 노송들이 늘어선 좁은 오솔길을 지나면 곧 시야가 트이고 약수동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2022년의 아름다운 단풍

오늘 이 길을 찾은 이유는 전에  이 길의 단풍이 특히 예뻤으므로 그래서 해마다 이 맘 때면 찾아오곤 하던 곳이었기 때문인데 어디를 보아도 빨간 단풍은 보이지 않는다. 노란 은행잎도 채 물들지 못한 채 떨어지고 있다. 올 가을에는 기후 변화 때문인지 서울 주변에서 선명하게 화려한 단풍을 볼 수 없다. 전국적으로 단풍철이 늦게  왔다고는 하나 이대로라면 붉은 단풍은 못  보고 올 가을을 보낼 것 같다. 약간 실망되고 서운하지만 자연의 조화를 인간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나?  다행히 빗줄기가 세차지 않아서 걷기 힘들지는 않다.


성곽길이 끊어지는 곳에 정자가 하나 있어서 여기서 잠깐이라도 비를 피해 쉬어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공사 중이라고 출입금지라고 한다. 계획한 일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며 반얀트리 클럽(옛 타워호텔) 골프연습장 옆길을 지나 국립극장을 향해 계속 걷는다. 골프연습장 옆은 마치 울창한 숲 속 같다. 멀리 북한남 삼거리에서 들려오는 달리는 자동차소리만이 우리가 도심 안에서 걷고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다.


반얀트리 클럽에서 내려와 국립극장 교차로에서 장충단로를 건너가 맞은편의 국립극장 옆길로 올라가면 남산공원의 북측 순환로와 만난다. 이 길은 봄에는 벚꽃길로도 유명하지만 가을에는 단풍길로도 아주 인기 있는 길이다. 그러나 오늘은 기대했던  화려한 단풍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알록달록한 색깔의 우산들이 우리의 두 눈을 즐겁게 해 준다. 평소에 이 길에는 근처 직장에서 점심시간에 산책 나오는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그들은 보이지 않고 길이 조용하기만 하다. 비에 젖은 공기도 신선하다.

산책길 중간에는 국립극장 뒤편으로  예전부터 활쏘기 장소였다는 석호정이 있고 근처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가 두 채 있어 여기서 잠시 우산도 접고 앉아서 쉬어 가기로 한다. 느릿느릿 걷기 시작한 지 거의 한 시간쯤 된듯하다.


남산둘레길은 마음만 먹으면 하루종일이라도 걸을 수 있을 만큼 길게 계속 이어지지만 오늘은 비도 오니까 내려가는  길은 비교적 짧은 길을 선택하기로 한다. 비를 맞아 더  운치 있는 단풍길을 한없이 걷고 싶은 마음도 있겠으나 몸은 비에 젖은 낙엽에 미끄러질까 봐 염려가 크다. 한 시간 이상 걸었더니  이제는 추운 날씨에 몸도 젖어서 따뜻한 곳이 그리워진다.


남산북측순환로 중간에 필동의 한옥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우리는 한옥마을을 통과한다. 이 한옥마을에는 우리의 한 친구가 어렸을 때 살았던 오래된 한옥이 시내의 삼각동(을지로 1가 근처)에서부터  이곳으로 그대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가끔 그 친구는 우리 모임과 함께  자신의 어릴 적 옛집 앞에 와서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우리는 그 옛 한옥을 멀리서 바라보며 친구를 생각하며 지나간다.

남산에서 내려올 때 우리가 꼭 들리는 단골 식당이 있는데 충무로역 대한극장 옆골목에 있는 굴밥집이다. 특히 오늘 같이 찬비 내리는 초겨울 날씨에 잘 어울리는 따끈한 굴돌솥밥을 먹을 수 있다. 게다가 굴이 많이 들어간 해물 파전까지 막걸리 한 모금과 함께 즐길 수도 있고.

오늘은 멀리 일산에서 오래간만에 나왔다고 커피를 산 친구와 더불어 분당, 안양, 강북과 강동에서 그야말로 서울의 동서남북 사방에서 멀리서 온 친구들이 중구의 남산에서 만나 걸었다. 평소보다 짧게 만천보쯤 된다.


2023년 11월 16일

매거진의 이전글 서울대 관악수목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