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에는 우리가 비교적 봄꽃 개화기에 맞추어 꽃구경을 다닌 것 같다. 산수유, 매화, 진달래, 개나리, 또 만개한 벚꽃까지 차례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꽃샘추위가 있었으나 운 좋게도 우리가 걷는 날에는 비도 많이 오지 않아서 활짝 핀 꽃들을 실컷 구경했다.
지난주에는 화사하게 절정을 이루었던 벚꽃이 며칠 사이에 꽃잎을 떨구고 연푸른 잎이 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깐 화려하게 피었다가 순식간에 져버리니 어떤 시골할머니가 벚꽃을 가리켜서 “정 없는 꽃"이라고 했다는데 한편으로 공감이 되기도 한다.
벚꽃도 지고 이제 무슨 꽃이 필 차례인가 하니 튤립이 생각난다. 예년에는 4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에 튤립 구경을 하러 갔으므로 벌써 튤립이 피었을까 하고 궁금해할 때 성수동에 사는 한 친구가 서울숲 군마상 앞에 튤립이 피기 시작했다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50 퍼센트쯤 피었단다. 이삼일 전이었으니 오늘은 더 많이 피었겠지?
오늘 만남의 장소는 지하철 수인분당선 서울숲역 3번 출구. 모두 열다섯 명이 모였다.
역에서 나와 “언더스탠드에비뉴”라는 낯선 이름의 거리를 통과해서 길을 건너 서울숲 공원의 출입구에 도착한다. 입구에서 달리는 말과 기수들을 조각해 놓은 군마상 옆으로 가니 벌써 꽃구경 온 사람들이 모여들어 길 양옆에 핀 튤립 꽃밭 사이에서 사진을 찍느라고 분주하다.
그러나 이곳은 튤립 길의 맛보기이고 좀 더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야 본격적으로 튤립을 감상할 수 있다.
우선 기다란 직사각형의 거울연못이 나타나는데 이 옆으로 나란히 이어지는 메타세쿼이아길을 따라간다. 메타세쿼이아 나무는 아직 새잎이 나지 않았지만 곧게 벋은 이 나무들이 푸르러지면 더 멋진 길이 될 것이다.
이 길이 끝나면 소나무 숲이 나타나고 그 아래로 환상적인 튤립 꽃밭이 양 옆으로 오색양탄자처럼 펼쳐진다. 여러 종류의 다양한 색깔의 튤립이 활짝 피어 있고 반쯤 피거나 이제 막 피려는 봉우리도 많이 섞여 있어 그 다채로움에 눈이 황홀해진다. 작년 보다 꽃이 훨씬 더 많이 핀 것 같아 우리가 올해는 때를 잘 맞추어 왔다고 좋아한다. 겨울 동안 물이 없던 중앙호수에 물이 가득 채워져 있고 호수 주변에도 튤립이 많이 심겨 있어 호수와 어울려 매우 아름답다. 호수를 돌아가면 성수고등학교옆으로 가을단풍길이라는 숲 속길이 이어지고 계속 가면 습지생태원에 이른다. 사람들이 보통 이곳까지는 잘 찾아오지 않아서 조용히 걷고 쉬기 좋은 곳이다. 습지생태원을 한 바퀴 돌고 유아숲 체험장 옆에 있는 정자에서 쉬어 가기로 한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튤립 소식을 전해준 성수동 친구가 얼마 전 서울숲에서 새로 개방한 숲길도 발견했다면서 그 길을 안내하겠다고 앞장선다. 그 숲길에 가기 전 은행나무숲과 벚꽃길을 지나간다. 은행나무들은 꼭대기부터 연두색 새잎이 솟아나고 있다.
은행나무길을 지나 이제는 꽃이 거의 지고 있는 벚나무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길가에 따로 연분홍 꽃길이 길게 이어져 있다. 멀리서 볼 때 떨어진 벚꽃 잎이 눈 같이 하얗게 쌓여서 눈 길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물 위에 떠있는 벚꽃잎들이다. 벚나무길 옆으로 좁다란 인공 개울이 흐르는데 그 물 위에 꽃잎이 떨어져 물길을 덮은 것이다. 꽃잎들이 가득하게 물길을 덮어 흐르는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혹시 어떤 사람이 이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여 물 위의 벚꽃을 한번 “즈려 밟고” 걸어가 보려다가는 개울물에 빠지는 해프닝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벚꽃길 중간쯤에서 새로 개방했다는 숲길로 올라갈 수 있다. 이 숲길은 정말 산속에 있는 길 같아서 깊은 산중을 걷는 기분이다. 옆으로 달리는 강변북로의 자동차 소음만 안 들린다면 말이다. 혹시 새소리 들리는 이어폰이라도 끼고 이 숲길을 걷는다면 제 맛이 나겠다. 아직 동백꽃도 드문드문 남아 있고 라일락 향기도 풍겨 온다.
오늘 새로 발견한 숲길을 즐기고 나와서 공원입구를 향해 간다. 공원 입구의 건너편에는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서 있고 그 지하에는 지하철역과 연결하여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 상가의 한 식당을 찾아간다. 그런데 이곳에 유명 미술관과 엔터테인먼트 회사도 있다고 하더니 많은 젊은이들로 통로가 북적인다. 좀 전에 서울숲에도 외국인 관광객들뿐 아니라 우리 젊은이들도 많더니.
우리는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을 피하느라고 조금 늦다고 생각되는 시간에 식당 앞으로 간다. 예약이 안 되어 잠시 기다리기는 했지만 운이 좋아 오래 걸리지 않고 점심을 먹을 수 있다. 점심 후에 들어간 역 앞의 카페에서는 오늘 몇 달 만에 다시 나와서 걷게 된 두 친구들이 복귀를 자축한다면서 후식으로 친구들을 초대한다. 이 친구들은 몇 달 전까지 빠지지 않고 거의 매주 함께 걷던 친구들인데 한동안 건강상 이유로 못 나오다가 이제야 회복하여 같이 걸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오늘도 무사히 걷고 집에 돌아오니 만보계가 목표를 달성했단다. 만이천 보가 넘는다.
그런데 저녁 뉴스에 일본 총리가 미국에 벚나무를 선물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백 년 전에도 미국에 벚나무를 선물한 적이 있다던데 일본은 이렇게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있구나. 요즘에 우리나라도 봄이 되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벚꽃축제를 한다고 요란하고 벚나무 가로수길이 도처에 많이 생겼지만 그래도 벚꽃 하면 외국인들은 일본만 머리에 떠올릴 텐데.. 오늘 우리가 서울숲의 튤립꽃밭을 거닐며 네덜란드를 떠올렸던 것처럼 말이다.(튤립의 윈산지는 튀르키예라고 하지만.)
우리는 어떤 봄꽃으로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만들면 좋을까? 봄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주는 홍매화? 아니면 살구꽃이나 복사꽃?
2024년 4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