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디자이너 라니씨가 추천하는 3월의 산책코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도 아니었고 나는 도심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아스팔트 킨트였기 때문에 봄이 와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가 "울긋불긋한 꽃대궐"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직장에 묶여 있었기에 사진앨범을 보면 여름과 겨울풍경만 보인다. 오죽하면 퇴직 후 희망사항 첫째가 봄에 꽃구경 하고 가을에 단풍놀이 가기였을까?
퇴직 후에는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으나 꽃구경을 제때에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봄이 되면 남쪽에서 꽃소식은 계속 올라오지만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개화기를 맞출 수도 없다. 해마다 꽃피는 시기도 다르고..
가까운 서울과 근처에서 꽃구경할 곳을 찾아보았다. 그래서 제일 먼저 발견한 꽃동네가 바로 청계천 매화거리였다. 다음 해부터는 청계천 매화꽃놀이가 연례행사가 되었고, 그다음 찾은 곳은 서울의 매화명소로 알려진 곳 창덕궁 낙선재 일원이었다.
창덕궁 후원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예약해야 되고 제한도 많아 자주 못 가는 곳이다. 그런데 낙선재 앞에 매화가 피었다니..
안국역에서 출발 도보로 7분 정도 걸으면 창덕궁 정문 돈화문이 나오고 신분증만 있으면 경로우대입장이 가능하다. 돈화문 지나서 인정전을 옆으로 보면서 계속 걸으면 낙선재 앞이다. 과연 소문대로 앞마당에 매화가 만개하여 화사함의 극치를 이룬다. 여기서 창경궁으로 들어가는 함양문 앞에 가면 또 한 번 탄성을 지르게 된다. 고목 홍매화가 활짝 피어 화려하다. 궁궐 건물과 어울려 그 아름다움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다. 매화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다투어 줄을 선다.
복잡한 인파에서 빠져나와 함양문을 통해 진달래꽃이 환영하는 창경궁 안으로 들어가면 분위기는 한결 조용해진다. 관광객은 훨씬 적고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만 보인다.
창경궁 - 내가 초등학교 3,4 학년쯤 이니까 1950년대 중반일 게다. 서른 살을 갓 넘은 내 어머니는 봄마다 우리 어린 5남매들을 데리고 창경원(창경궁의 당시 명칭) 벚꽃놀이를 가셨다. 그때의 흑백 사진 속 아이들 중에는 아기포대기에 싸여 어머니품에 안겨 있던 갓난동생들도 있었다. 하긴 유모차도 없었을 테고 어머니 모습은 한복 차림이다.
당시 창경원은 전쟁 이후 서울 시민이 소풍 갈 수 있었던 유일한 놀이공원이었다. 어른들은 눈부신 벚꽃그늘에서 봄꽃놀이를 즐겼고 우리 아이들은 그곳 동물원의 동물들을 보고 놀이기구도 타며 좋아했을 것이다.
추억의 벚나무들과 동물원이 이젠 모두 과천의 서울대공원으로 옮겨가고 이곳에는 흔적도 없으나 원래의 궁궐이 복원되어 다행이다. 이제는 벚나무 대신 매화와 산수유나무들이 그 자리에 심겨 있고 개나리 진달래등이 전각 뒤 화계를 장식하고 있다.
잠시 60여 년 전 어릴 적 창경궁을 기억하면서 전각들을 돌아 소나무숲 사이를 걷다가 옥류천에 이른다. 옥류천은 창덕궁에서 시작해서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가는 창경궁의 금천으로 물가 양쪽으로 매화나무를 비롯해서 살구꽃 앵두꽃나무들이 있다. 지금은 매화꽃만 피어 있지만 앞으로 다른 꽃들도 마저 피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꽃대궐을 이룬다.
회랑 한쪽 툇마루에 앉아 넋을 잃고 꽃을 감상하다가 춘당지를 한 바퀴 돌고 연못 근처 야생화정원에서 복수초 피었나 확인한다.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으로 나와서 창경궁로를 따라 명륜동 쪽으로 가다가 근처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옆 카페에서 후식까지 마치고 해산하려다가, 가보고 싶었지만 아직 못 가본 길을 좀 더 걸어보기로 한다. 바로 율곡터널 윗길로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길이다. 오래 동안 공사하다가 작년 여름에 개통된 새로운 길인데, 지난겨울에 가보려다 전날 내린 눈 때문에 통행이 금지되어 못 걸었다. 율곡터널 위 종묘 돌담길은 새로 단장되어 멋진 산책길이 되었다. 중간에 있는 북신문이 열려 그리로 통행할 수 있으면 더 좋으련만.. 창경궁 정문에서 창덕궁 정문까지 약 30분쯤 걸린 것 같다. 집에 오니 오늘 전부 14449 걸음 걸었다.
앞으로 많은 봄꽃들이 다투어 필테니 무슨 꽃을 제때에 볼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2023년 3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