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연말이 가까웠지만 시국이 어수선하여 사람들이 방향을 못 잡고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흥분하지 말고 냉정하게 이성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과거를 돌아보며 역사공부도 하고 역사에서 교훈도 얻었으면 좋으련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라니씨는 이제까지 하던 일을 하던 대로 해보겠다고 아침에 집을 나선다.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七十以從心所慾不踰矩”(나이 일흔에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제까지 하던 일이란 다름 아니라 매주 목요일에 친구들이 모여서 걷는 일이고 또 해마다 한 해를 보내면서 갖는 송년 모임이다.
오늘은 양재천을 걷고 개포동역 근처에서 송년모임도 가지려고 한다. 개포동역 근처에 전망 좋고 피자 맛도 좋은 브런치 카페가 있다고 하니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 카페는 예약방식이 이상했다. 낮에는 예약을 안 받고 손님이 입장하는 순서대로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요즘에는 그런데가 많다나. 평일이니 그래도 혹시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고 불안하기는 하지만 막연한 기대를 갖고 그리 가기로 마음먹었다.
오전에 지하철 3 호선 도곡역 3번 출구에서 열여섯 명이 모인다. 양재천이라서 걷는 길이 평탄할 테니 안심이 되고 또 송년모임이라니 이 기회에 한 해가 가기 전에 친구들도 만나보겠다고 많이 모인 것 같다.
도곡역에서 양재천 쪽으로 늘벗공원이라는 근린공원을 지나니 곧 양재천 둑길에 이른다. 둑길에서 동쪽 탄천 방향으로 걷다가 둑 아래로 내려가 양지바른 하천변의 자전거길 옆 보행로로 걷는다. 윗길인 양재천로는 가을단풍로라는 이름도 붙어 있는데 단풍철에 왔으면 아름다웠을 것 같다. 봄에는 이곳이 벚꽃길로도 유명하다.
오늘은 벚꽃도 푸른 녹음도 가을단풍도 볼 수 없고 가지만 앙상한 나무들만 서 있고 하천변 부지의 갈대밭도 다 베어지고 황량하지만 쨍하게 파란 겨울하늘이 쓸쓸한 하천 풍경을 보완해 준다. 양재천길을 따라 걷다가 영동대교와 대치교 아래를 지나서 양재천과 탄천이 합류하는 지점 직전에서 잠깐 쉬어 간다. 이곳을 반환점으로 오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하천변 길이 아니라 둑길로 올라가서 걷는다. 옆으로 양재천로 자동차길이 나란히 가므로 차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이 길은 역시 걷기 좋은 산책길이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 나온 듯한 젊은 직장인들도 많이 보인다.
영동 5교 아래를 지나서 징검다리 위로 양재천을 건너 개포동역 방향으로 간다.
우리가 혹시나? 하고 점찍어 두었던 전망 좋다는 브런치카페는 두 시간을 걷고 점심시간이 지난 1시쯤 도착하였는데 그때부터 역시나~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까지는 기다릴 수 없다고 실망하며 그곳은 포기하고 근처의 샤부샤부 집을 찾아간다. 갑자기 많은 인원이 예약도 안 하고 들이닥쳐 종업원들을 당황하게 했으나 그런대로 무사히 따뜻하게 점심을 해결한다. 점심에는 총동창회장까지 참석하여 모두 열일곱 명이 되었다.
점심 후에는 보통 카페로 향하지만 여럿이 들어가면 한 군데 자리를 잡을 수 없으니 오늘은 주최 측이 특별히 여럿이 앉을 수 있는 큰 방을 마련한다고 근처의 노래연습장을 인터넷으로 찾아 예약하여 음악? 있는 곳에서 색다른 송년회를 해보자고 했다.
찾아간 식당 근처의 노래방은 낮에는 잘 이용하지 않는지 썰렁하니 아직 난방이 안 되었고 조명도 부족하여 방이 아주 어두컴컴하다. 조명 좀 밝게 해 달라니 조명 등 한 개를 어젯밤 왔던 손님들이 망가뜨리고 가서 오늘 저녁에나 고칠 수 있다는 노래방 여주인의 말이다. 그래도 어둠에 익숙해지면 괜찮겠지 하며 노래방 기기를 작동시켜 보니 팡파르 음악이 갑자기 천둥 같은 굉음으로 울려 나와 모두들 깜짝 놀라서 어리둥절한다.
라니씨는 오래전 대학에 재직한 적이 있어 학생들과 함께 또는 친지들과 같이 가끔 노래방에 가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건 한국에 처음 가라오케가 수입된 지 얼마 안 된 삼사십 년 전 일이었고 오늘 오래간만에 와 보니 장소는 그때와 비슷하지만 너무 생소한 분위기이다. 다른 친구들은 더더욱 낯설어해서 적응을 못 하는 것 같고 호응도도 별로 높지 않다. 결국 노래도 몇 곡 못 부르고 주최 측이 준비한 송년선물만 나누어 주고 예약시간도 다 못 채우고 일찍 노래방을 나온다. 노래방 여주인은 우리가 놀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아주 안타까워한다. 오늘 추억의 노래 찾기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난 것 같다. 우리가 공유하는 추억의 노래가 많은데..
옛날 옛적 집에 전축도 없고 라디오도 흔하지 않던 시절에 학교에서 배운 동요를 비롯해서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합창대회 때 했던 노래들, 또 한글로 원어가사를 베껴서 따라 불렀던 영어 팝송, 그리고 자식들이 자랄 때 함께 듣고 부르던 유행가들.. 이런 노래들을 다 같이 함께 부를 수 있었으면 즐거웠을 텐데... 오늘은 어쨌든 실패했으니 내년에는 노래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서 다시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실망스러운 마음을 달래 본다. 추억의 옛 노래를 부르는 것이 노인 치매예방에도 좋다고 하는데. 그래서 노인을 위한 동요 부르기 교실, 가곡 부르기 교실도 많이 생기지 않는가?
그런데 오늘 우리의 수난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찜찜한 기분으로 초라하고 어둑한 노래방을 나와서 근처의 카페를 찾아갔으나 한 카페는 폐점하였고 다른 두 카페는 꽉 차서 자리가 없다. 요즘 불경기라면서? 어쩌나? 오늘 오후에는 우리가 완전히 머피의 법칙대로 헤매고 다닌 것 같다. 마음먹은 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올해 색다른 송년회를 해보자고 한번 시도해 보았으나 우왕좌왕하면서 엉망진창으로 끝나버렸으니 미비한 준비로 친구들을 고생시킨 것 같아 친구들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이 들뿐이다.
그래도 오늘 그럭저럭 만 삼천 보 이상 걸었다. 운동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추운 날 방구석만 지키고 있었던 것보다는 나았을 거라고 한 가닥 위안을 삼아볼까?
2024년 1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