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도 지나가고 절기가 춘분을 향해 가고 있으니 이젠 봄기운이 완연하다. 아파트 베란다의 영산홍도 때가 되었다고 분홍빛으로 피어나고 한 구석에 쳐박혀 있던 지난 해의 호접란들도 실내로 들어 와서 줄줄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화려한 색들을 뽐내고 있다.
화창한 봄볕 아래 비록 유리창 안에서지만 색색으로 피어나는 꽃들을 다시 보니 지난 겨울의 우울함이 다소 가라 앉으며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것도 같다.
지난 겨울은 우울했다. 그 두어달 동안 가까운 친구들이 셋이나 세상을 떠나고 스스로 건강도 자신이 없어지니 이젠 우리가 그럴 나이가 되었나보다 하며 자연에 순종해야지하고 체념하면서도 서글퍼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빛에 기운이 나는 듯하고 기분까지 설레면서 집을 나선다.
오늘은 편백숲이 좋은 은평구 봉산으로 향한다.
지하철 6호선 새절역 3번출구에서 열 명이 모였다. 작년에도 한 번 와 본 곳이기에 익숙하게 새절역에서 나와 은평구 마을버스 10 번을 타고 종점인 숭실고등학교 정문까지 간다. 종점에서 버스를 내려서 산 쪽으로 주택가를 5분쯤 올라가면 곧 “봉산 편백나무 힐링숲"과 “봉산 무장애숲길”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얼마 가지 않아서 편백나무 숲길에 이른다.
우리는 작년 봄에도 이 길을 걸어본 적이 있지만 그때는 5 월 초였기 때문에 이미 봉산은 신록으로 뒤덮여 있어 늘푸른 나무 편백나무숲의 진가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직 잎이 나지 않아 앙상한 나목들 사이에서 편백나무들이 제대로 짙푸른 빛을 발하고 있다.
편백나무 피톤치드를 흠씬 들이 마시며 햇빛 쏟아져 들어오는 무장애숲길을 이삼십 분쯤 오르니 화장실과 편백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가 조금 더 가니 은평구의 전경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마주 보이는 북한산 풍경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다만 오늘은 미세먼지가 좀 있어 북한산 능선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여서 유감스러울 뿐이다.
작년에는 무장애 숲길로 이곳까지 왔다가 전망대를 반환점으로 하고 숭실고등학교 쪽으로 다시 내려갔으나 오늘은 봉산의 정상(209 미터)까지 올라가서 봉수대와 봉산정을 지나 작년에 가 보지 못했던 수국사를 거쳐 구산동으로 내려가 보자고 했다. 그래서 서울둘레길의 표지판을 따라 계속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 얼마를 더 오르니 이제는 편백숲이 끝나고 활엽수림이 시작되며 그 사이의 흙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눈앞에 오르막 계단길이 나타나지 않는가? 꽤 길어 보인다! 다른 산책객들은 모두 그리로 올라가지만 우리 중에는 계단을 겁내는 친구들이 몇이 있다. 혹시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는 길이 없을까? 하고 옆에 보이는 산길로 들어서 본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선 길은 활엽수가 울창한 숲속 오솔길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아래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길을 잘못 들었다! 하지만 갈림길에 “봉산 둘레길”이라는 표지판도 있고 아랫쪽으로는 가까운 곳에 아파트단지도 보인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도 이미 늦었으므로 봉수대는 포기하고 서울둘레길이 아니라 봉산둘레길로 하산한다. 경사가 꽤 있는 오솔길을 조심조심 내려와서 큰길에 이르고 보니 처음 와 보는 낯선 동네이다. 고양시 향동이라고 새로 개발된 지역인 것 같다. 지도를 보니 우리가 구산동이 있는 봉산의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럭저럭 점심때가 되었으니 점심부터 먹기로 하고 지나는 행인에게 식당가가 있는 곳을 물어 식당을 찾아간다. 갈비집 이라는 간판이 있어 혹시 비싼 곳이 아닌가하고 문앞에서 주저하다가 들어갔는데 마침 점심 특선이라고 비싸지 않은 메뉴가 있어 선택해 보니 아주 푸짐하여 모두 맛있게 먹었다. 개업한지 얼마되지 않은 듯 젊은 식당주인은 매우 친절하고 서비스도 좋다. 또 건물 뒤쪽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에서는 무슨 행사를 한다고 커피값도 할인해준다. 낯선 새 동네에 오니 새로운 고층건물들이 즐비하여 외관은 도시의 모습이나 인심은 시골인심 같다.
모두들 점심에 크게 만족하여서 방금 전에 잠시 길을 잃고 모험을 하며 비탈진 산길을 내려오느라고 힘들었던 것을 다행이도 잊은 듯 했다.
돌아올 때는 고양시 시내버스를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까지 가서 거기서 헤어졌다.
오늘도 만천 보는 넘게 걸었다.
2025년 3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