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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매화길

by 지현

이틀 전에는 때아닌 봄눈이 내렸다. 창밖으로 어지럽게 휘날리는 눈을 내다 보니 문득 옛 시조 한수가 떠 올랐다.

“매화 옛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예피던 가지에 핌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이틀 뒤인 바로 오늘 매화꽃을 구경하러 청계천 매화거리를 걷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눈이 내린다면 오늘의 매화꽃도 필동말동 하지 않을까? 다행히 봄눈은 금방 다 녹아버렸지만 말이다.

요즘 남쪽에서는 매일 꽃 소식이 연달아 올라오고 있으니 우리도 꽃타령을 하기 시작하지만 서울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다. 봉은사의 홍매화가 이제서야 몇 송이 피었다는 소문이 있고

올해는 봄꽃들의 개화기가 늦다는 예보도 있다.

그래도 혹시나?하고 매화를 보러 청계천으로 향한다. 서울의 몇 안 되는 매화 군락지 중에서 청계천 매화거리에서는 비교적 일찍 꽃이 피기 때문이다.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 3번출구에서 여덟 명이 모였다. 다른 친구들은 바쁜 일들이 있는지 오늘은 평소 보다 인원수가 적다. 오랜만에 신고 없이 깜짝 등장한 두 친구가 없었다면 모임이 작아져서 아주 오붓할 뻔 했다.

역사에서 나와서 앞서 가는 여대생들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니 왼쪽으로 한양대학으로 가는 길이 나오고 오른 쪽으로는 중랑천이 흐른다. 중랑천 변에 이르자 육중하고 고풍스러운 돌다리가 보이는데 바로 살곶이 다리다.

이 근처가 예전에는 매 사냥터, 말 목장, 군대의 사열 장소가 있었던 곳이라고 해설이 적힌 안내판이 서 있다. 또 조선 초기에 이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오다가 마중 나온 아들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꽂힌 곳이라는 고사에서 비롯하여 그 이후로 이곳은 살곶이벌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살곶이 다리도 생겼다는 설명도 있다.

살곶이 다리는 오랜 세월 지나는 동안 대홍수와 전쟁으로 많이 손상되었으나 복구되어 남아있는 부분만 보아도 600 년전의 돌다리 축조기술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중랑천을 따라서 살곶이 체육공원을 돌아가면 시내를 관통하여 흘러 내려오는 청계천과 만난다.

청계천에서 다리를 건너 반대편 천변길을 북쪽을 향해 걷는다. 왼편 위로는 고가도로인 내부순환로가 청계천을 따라 지나가고 오른 편에는 석수역에서 출발하여 신설동까지 운행하는 지하철 2호선 지선의 철로가 지나간다. 이 철로의 담벽과 청계천 사이 물가에 산책로가 조성되어서 많은 시민들이 찾는 길이 되었다. 산책길 옆에는 버드나무가 갓 피어나 푸릇푸릇한 잎이 달린 가지를 운치있게 늘어 뜨리고 서 있어 봄 기운이 완연하다.

이 길에서 매화는 용답역과 신답역 사이에서 특히 많이 볼 수 있는데 어느새 이곳은 봄이 되면 서울의 매화 명소가 되어 오늘도 성급한 상춘객들이 꽤 보인다. 매화나무를 경남 하동에서 2006년에 옮겨 왔으므로 하동매실거리라고 새겨진 표석도 서 있다. 선로의 담벽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매화나무들은 거의 20년 가까이 되어 가니 키가 많이 커졌다.

어제와 오늘 날씨가 따뜻하기에 혹시 그 사이에 꽃이 피지 않았을까하고 조바심을 내며 기대했지만 역시 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콩알 만한 꽃망울들만 높은 가지에 줄줄이 매달려서 곧 터지기만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신답역에 가까이 가니 대나무 숲 옆 콩크리트 담벽에 붙어 있는 홍매화 가지에 몇 송이 꽃이 활짝 피어 있다. 방금 꽃망울만 보고 좀 실망했던 친구들의 표정이 밝아진다.

지나가던 다른 사람들도 몇 안 되는 꽃송이라도 잘 찍어 보겠다고 카메라를 이리저리 들이대고 있다.

청계천 매화는 다음 주(3월 마지막 주)나 되어야 만개할 것 같다. 봄꽃 피는 시기를 맞추기가 정말 쉽지 않다. 작년에도 멀리 경인 아라뱃길의 매화동산까지 갔으나 성공하지 못 했으니 말이다.

신답역과 제2 마장교 아래를 지나 청계천을 따라 더 올라가면 머리 위로 신답철교 가 지나간다. 철교 아래를 지나서 오른 편 둑으로 올라가니 용두역 사거리로 곧 용두공원이 나온다. 용두공원을 지나가면서 활짝 핀 산수유와 샛노란 영춘화를 보니 필동말동한 매화 꽃망울만 보고 아쉬웠던 마음이 달래진다.

영춘화는 봄맞이꽃이라고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꽃인데 꽃의 크기와 색깔이 개나리와 똑같아서 한 때 두 꽃을 구별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 칠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모두 “영춘화는 꽃잎이 다섯 개, 개나리는 꽃잎이 네 개...” 라고 한 마디씩 아는 척 하면서 지나간다. 길옆의 벚나무 가지 끝에는 성급한 벚꽃도 한 두 송이 피고 있다.

용두공원 옆에는 대형마트가 하나 있는데 오늘은 여기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푸드코트에서는 점심 뿐만 아니라 가까이에서 커피까지 마실 수 있고 그런 다음에는 마트 바로 앞에 있는 용두역에서 헤어질 수 있으니 여간 편리하지 않다.


오늘은 카페를 찾느라고 멀리 걸어다니지 않았기 때문인지 걸음수는 만보를 넘지 못 한다.


2025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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