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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진 Nov 10. 2017

청춘마리오네트 #4

일상: 보이지 않는 검은 선(線)

오늘도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곧장 집에 오면 여유 있는 망상을 할 수 있었다. 교복에 가지런히 붙어 있는 명찰이 보기 싫어서라도 얼른 집으로 달려가는 내 마음을 몇몇 친구들은 안다. 그러다 갑자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현관문 유리로 보이는 실루엣을 감상해보자니 익숙지 않은 의문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누구세요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부모님이 계시냐는 말을 먼저 듣게 되었다. 평소에 반항적인 성격이기에 나는 그들을 노려보며 대답하지 않고, 누구냐고 물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게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친구라고 했다. 한 사람은 키가 작고 메마른 체형이었다. 학교 선생님과는 확실히 다른 인상이었기에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입이 삐죽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무언가 화난 상태 같았다. 그 뒤에 있는 덩치 큰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구경만 하고 있었다. 벙어리인가 싶어서 얼마 전 특별활동 시간에 배운 수화라도 해볼까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힐끗 눈길만 주고, 나와 대면하고 있는 사내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어머니께 배운 예의범절대로라면 우리 집을 방문해주신 어른들에게 차라도 건네야 했지만, 고등학생인 나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기분 나쁜 기운 때문에 문전(門前)에 서서 방어태세만 취하고 있었다. 메마른 사내는 내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행동을 취하려 했고,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 머리로 착륙하는 사내의 손을 노려보았다. 마치 중학교 시절 자연과학 시간에 돋보기로 나뭇잎을 태우듯 내 눈으로 마른 장작 같은 그의 손을 태우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을 때는 정수리에서 뒤통수를 거쳐 목덜미로 내려와야 정상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정수리에서 내 이마를 거쳐 양미간까지 빗자루 숱 고르듯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라운드 티셔츠 중앙에 매달려 있는 선글라스에 비친 나의 형상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더는 참지 않고,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부모님 계실 때 다시 오시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재빠르게 들고 와서 그들의 면상(面像)을 저장해 두고 싶었지만, 삽시간에 그들이 떠나버렸기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들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일순간 동네 친구들 아니 명환이라도 불러서 저 녀석들을 혼내주고 싶은 정의감에 불탔지만, 이내 참기로 했다. 괜히 귀찮기 때문이다.  

   

내가 오후에 겪은 이야기를 아버지께 해드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밤 소주 한 병을 드시며 하루를 정리하시곤 하는데, 오늘은 세 병째 소주를 드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풀어가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쯤 아버지께서 먼저 집에 누군가가 찾아오거든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밖에서 경찰관이라고 말해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하시는 거 보면 우리 가족이 아무래도 꼭꼭 숨어있어야 하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라고 박력 있게 대답했고,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은 그냥 말씀드리지 않았다. 내가 의심 없이 문을 열어버렸다는 실수가 혼날 것 같기도 했고, 괜히 좋지 않은 일을 말씀드려서 곧 있을 아버지의 꿈나라 여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괜히 나만 손해 볼 것이라는 엄청난 계산속에 내린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밤은 정말이지 벽을 향해 날아가는 소주병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드시는 소주잔에 비친 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오후에 만난 메마른 사내의 선글라스에 비친 내 모습을 연상케 했다. 선글라스의 내 얼굴은 코를 중심으로 얼굴 중앙이 돌출된 모습이었고, 소주잔의 내 얼굴은 얼굴 전체가 사정없이 흔들려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흡사 유령 같다고나 할까. 어쨌든 두 모습 모두 기분 나쁜 형상이었기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앞날이 미치도록 창창한 고등학생인 내 삶에 왜 계속 누군가 훈수를 두려는 것일까.     

  - 나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 (사람들 말에 속지마. 넌 그저 열심히 일할 의무만 있어)

  - 나도 언젠가 행복해질 거야

  - (보이는 게 전부야. 너무 상상하지마)    


뉴스에서는 연일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빚쟁이에게 쫓겨 결국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는 이야기, 빈부 격차가 역사 이래 최고라는 야이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며, 내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해본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긴 하루였다고 생각하면서 이불 속에 고단한 몸을 맡긴다. 눈을 감자 하루의 일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갔고, 일순간 어둠만이 남았다. 어둠 속을 한참 쳐다보고 있으니 내 얼굴의 윤곽이 나타났다. 분명히 내 얼굴이다. 약간은 달걀형 얼굴에 찢어진 눈, 숨쉬기에 딱 알맞은 크기의 콧구멍, 솜털에 가까운 나의 소중한 수염, 그리고 학생으로서 부족함 없는 단정한 머리. 오히려 어둠에 비친 내 얼굴이 빛나 보였다. 물론 채색(彩色)이 필요하지만, 이것은 차차 살아가면서 채워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껏 부풀어 오른 마음을 뒤로한 채 함박웃음을 짓고 잠을 청해보았다.     

내가 잠든 날 밤, 아버지는 집을 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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