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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Apr 23. 2023

환대와 교감의 스펙트럼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우리는 우주의 수천억 개의 별 중 지구라는 곳에 정착해 살고 있다. 지구가 아닌 또 다른 별에도 분명 인간의 감각으로는 느껴지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완전한 타자가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김초엽 작가의 「나를 키우는 주인들은 너무 빨리 죽어버린다」는 그런 낯선 타자와의 조우, 그 만남 속에서 서로의 존재 가치를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내진 먼 미래 이름 모를 행성의 편지와도 같다.


  외계 생명체 탐사 연구원인 희진은 우주탐사에 나섰다가 광자 추진체 결함으로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외계 행성에 불시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희진은 ‘루이’라는 존재를 만난다. 루이의 보살핌을 받으며, 희진은 감각의 경계선 너머에 존재하는 외계 세계에 적응하고, 낯선 타자와 교감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해지는 점이 있다. 루이는 왜 희진을 보살폈을까. 루이의 수명은 3~5년 정도이다. 루이가 죽으면 또 다른 루이가 찾아오고, 또 죽으면 또 다른 루이가 찾아와 희진을 보살폈다. 루이가 희진을 계속 보살폈던 이유는 아마 루이들의 입장에서 연약하고 낯선 타자로 존재하는 희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희진이 유약한 이방인이었기에 환대받은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루이가 희진을 보살핌으로써, 환상적인 존재를 향한 경이로움을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신비한 개체인 희진과 소통하기 위해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노력했을 수도 있다.


  조금의 행동 차이는 있었겠지만, 루이들은 모두 그림을 남겼다. 루이가 다음 루이에게 기록을 전달하며 종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들의 언어가 색채임을 알아낸 희진은 지구로 돌아와서 색채 연구를 하며 남은 생을 보낸다. 희진은 자신이 외계 생명체와 만났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그 이상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은 희진이 ‘최초의 조우자’였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희진이 루이의 존재에 대해 함구하였는지 생각해보았다. 희진은 루이를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루이는 오직 루이가 남긴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희진은 루이가 지구인들의 연구대상으로 남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만약 희진 이후에 또 다른 지구인이 루이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루이와 희진의 관계가 재현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현 제목은 <스펙트럼>이다. 스펙트럼은 빛을 파장에 따라 배열한 것을 말한다. 희진이 경험한 낯선 세계는 인간이 지닌 감각의 스펙트럼 바깥에 있어 그 세계를 정확히 해석하거나 분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타자를 이해하고 교류하고 싶어 하는 간절한 바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스펙트럼을 더 넓게 확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더 선명하고 다채로운 빛깔로 세상을 물들이는 것이다.


  SF 문학을 그저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을 그려내며, 기발한 상상력을 담은 이야기라고만 정의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SF 문학이 가리키는 방향은 비현실적인 공간이 아닌 ‘지금-여기’가 아닐까 싶다. 미래의 시공간을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리는 세계는 언제나 우리의 간절한 열망과 믿음이 투영되고 현실화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존재 가치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그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스펙트럼을 더욱 넓혀준다.


  마침내 희진은 오랜 색채 연구 끝에 루이가 남긴 문장을 해석해낸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루이가 바라본 희진이었다. 루이는 희진을 보고 있었고, 희진의 뒤로 펼쳐진 노을을 보고 있었다. 희진은 루이의 눈에 비친 노을의 붉은 빛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그럼 루이, 네게는 저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겠네.” 


  희진은 결코 루이가 보는 방식으로 풍경을 볼 수는 없겠지만 루이가 보는 세계를 약간이나마 상상하며 기쁨을 느낀다. 이렇게 어떤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감정의 교류로, 그 교류는 다시 애정으로 전이된다. 희진과 루이의 관계가 신기하면서도 당연하게 흘러갔다. 희진은 루이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환상적인 존재 양상에 경이로워한다. 그리고 따뜻한 환대와 소통에 벅찬 감정을 느낀다. 루이들 역시 희진이라는 낯선 타자를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낯선 타자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불가능 속에서도 교감을 위해 노력하며, 상대에게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데에 온 시간과 정성을 쏟는다. 찬란한 색채를 이루고 있는 루이의 그림, 그 색채 기록을 연구해온 희진. 그들은 서로의 경계선을 넘어 맞닿아 있었다.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그리려고 한다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포착하고 기록하는 것이 SF 문학이 아닐까. 우리가 차마 닿을 수 없는 미래를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세계를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이라고만 여겨서는 안 된다. 이 지구라는 별에서 우리는 더 나은 이가 되기 위해, 그렇게 해서 더 나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 상상력을 고이 접어 먼 미래 이름 모를 행성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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