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그러니까 까마득히 오래 전, 친구 권유로 읽은 하루키 소설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재밌게 술술 읽었으나, 머리에 남은건 재즈, 섹스, 그리고 파스타 뿐. 다소 허세의 느낌이 들어 거북했달까. 이후에는 점점 그의 매력을 알고 좋아하게 되었으나, 어쨌든 '남자 혼자 해먹는 파스타'에는 그 시절의 늬앙스가 희미하게 묻어있는거 같다. 조금은 느끼한. 나만 그런 편견을 지우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그러나 음식 해먹기를 즐기던 어느날 파스타가 나에게 일상의 음식이 되있음을 깨달는다. 물론 내가 국수를 밥 이상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칼국수나 멸치국수를 일상으로 먹기는 힘들지 않나. 국물 국수는 육수를 내야하거든. 알고보니 파스타야 말로 매우 실용적이며 소박한 음식이었다. 본고장 이태리가 아닌 한국에서도 충분히 동작하는. 자꾸 강조하는 일상의 음식이란?
일상의 음식으로 걸맞게, 일단 조리 시간이 짧다. 이제 몸에 익으니, 간단한 파스타는 냄비에 물 올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먹어치우기까지, 30분 남짓으로 가능해졌다. 라면 외에 이보다 단촐한 국수가 있을까 싶다. 또 특별한 재료 없이, 그냥 되는대로 냉장고를 털어 남은 재료 있는 재료로 섞어 만들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섞으며 조합에 따라, 물리지 않게 매번 새로운 음식이 되는 것도 걸맞는 특징일테고.
떨어지지 않게 신경 써야 하는건 파스타와 올리브유, 소금, 마늘 정도. 모두 유통기한 걱정 없고 용처가 많아 상시 구비할 재료들. 이거면 최소한 알리오 올리오라도 먹을 수 있다. 거기에 엔초비 한 병 사두면 감칠맛 내기도 좋다. 없다면 참치캔으로 먹어도 되고. 명란젓 추가한 파스타 역시 우리 집 즐겨 먹는 메뉴. 새우나 조개 등 해산물이 있으면 물론 맛있는 메뉴가 완성이 되고. 토마토소스가 있다면 그냥 볶아 먹어도 되고, 관찰레나 베이컨까지 있다면 아마트리치아나를 먹을 수 있는 날이다. 돼지고기 찌개 거리가 남아 있다면 간장 소스에 무쳐 먹기도 하고. 대파로 기름을 내면 그것도 꽤 좋은 향의 파스타가 만들어진다. 양배추, 마늘쫑 등 남은 짜투리 채소는 파스타로 처분한다. 생면과 소스를 만들며 기를 쓴 것도 파스타고, 대충 기름 두르고 먹는 것도 파스타고. 그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요약하면, 쉽고 빠르며 가격 합리적인데, 물리지 않도록 매번 다르게 변주하여 먹을 수 있으니, 일상의 음식으로 조건은 완벽하지 않은가. 요즘도 늦은 저녁 귀가 후 냉장고를 뒤지고, 달리 먹을 것이 없다면 큰 냄비에 파스타 삶을 물을 올린다.
아, 파스타가 익숙해진 것은 랜선 선생님의 덕이 절대적이다. 리스펙트를 담아.
https://www.youtube.com/c/Kimmil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