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수전 팔루디, 『다크룸』
* 이 글에는 영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와 <대니쉬 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구분, 단 하나의 진정한 이분법이 있구나. 삶과 죽음.” 수전 팔루디는 ‘영원한 이방인’인 아버지의 회고록 『다크룸』 마지막 글에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그 외의 것들은 그저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몇 년 전 할아버지 장례식장에 ‘6·25참전유공자회’의 퇴역군인들(노인들)이 와서 군대식의 장례의전하는 모습을 보며 마지막 길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알리는구나, ‘한국의 남성성’의 그림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의 삶 전체는 국가, 전쟁, 남성성 등의 성실한 수행이었다. 전쟁의 상흔이 깃든 몸의 총알자국과 그 기억은 죽음 직전까지도 손녀에게 알리고 싶은 메시지였고, 정치적인 차이로 늘 만날 때마다 싸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를 그렇게 만든 건 무엇 때문이었을지 질문이 따라다녔다. 흔한 세대차이, 이념차이 등의 이유를 뛰어넘어 서고 싶었는데, 그 실마리는 끊임없는 대화의 시도였다. 할아버지에게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나도 궁금했다.
수전의 아버지도 ‘청자’, 그 중 딸을 통해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연락도 없다가 수년 만에 갑자기 이메일을 보냈다. 76세가 된 ‘스티븐 팔루디’는 ‘스테파니 팔루디’가 되어 있었다. 그의 새로운 정체성이 과거의 정체성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그 역사와 계속해서 재협상하면서 과거로부터 어떻게 깨고 나오고 있는지를 수전은 알고 싶어 한다. 이 책은 10년 동안의 한 개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헝가리 역사와 세계 대전 당시의 홀로코스트를 마주하게 하며 그런 역사적 흔적에 개인의 삶이 불가분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저널리스트로서의 집요함도 발휘하지만 무엇보다 딸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혼란,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의 고민까지 생생하게 담겨있다. 아버지와 딸의 대화는 어느 정도 진전이 될 때도, 이상한 훈계로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이 반복되는데, 수전의 그 감정에 따라 읽는 사람도 함께 요동이 친다.
가족은 어떻게 보면 친밀하면서도 친밀할 수 없는 관계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라는 영화에서는 주인공 명은이(신민아 역)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춘 아버지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데, 이 과정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함께 살고 있었던 ‘이모’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딸인 명은이 ‘아버지’에게 가장 아픔을 주는 사람이었다는 것까지. 명은이 언니인 명주(공효진 역)는 트랜스 한 이모의 정체성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이렇게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너 생선 구울 때 자꾸 뒤집는 거 아니다. 한쪽이 다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라며. 어떻게 보면 가족에게조차 ‘패싱’하고 있는 것은 가족이어도 이해를 모두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면 가족이기 때문에 알아주기를 원하는 기다림의 미학을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 주변에 트랜스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가족 때문에 얼마나 상처받고 있는가.
수전의 ‘아버지’ 스테파니가 태국에서 트랜스젠더 수술을 받은 이후 재회를 하는 순간, 수전은 스스로 보수적이라는 것에, 본질주의자가 된 것 같은 느낌에 놀라한다. 두 개의 젠더를 대하는 인사말이 입안에서 맴돌면서 아버지라는 호칭을 어떻게 써야할지, 새로운 정체성으로 그를 떠나보낼 준비가 됐는지 알 수 없어 한다.(47쪽) 무엇보다 스커트를 입고 진주귀걸이를 하는 등 ‘여성성’을 수행하고 있는 아버지의 행동과 다음과 같은 말에서 반감을 가진다.
“이제 나도 숙녀니까, 모두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줘”(49쪽), “남자는 나를 도와야지.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한다고. … 그게 여자로 살아가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 아니겠니”(83쪽) 스테파니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의 신화’를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그동안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으로부터 만들어진 ‘여자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벌여왔는데, 왜 오히려 강화시키는가. 더 나아가 흔히 보게 되는 ‘강요된 여성화물’에서 나타나는 트랜스젠더 정체성에서 여성이 된다는 것은 에로틱하게 묘사되는 방식으로(116쪽) 전락되었다. 젠더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한 퍼포먼스인 ‘드랙퀸’도 가끔 불편해 보이는 이유도 ‘젠더 수행성’이 교란된다기보다 오히려 젠더를 더욱 공고화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몸의 섹슈얼리티를 과장하다시피 드러내며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LGBT 잡지의 한 인터뷰에서 ‘페미니스타’로 소개된 스테파니는 인터뷰어에게 자기가 ‘가십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여자’라고 했고, 몇 살이냐고 물으면 부끄러운 듯이 “숙녀에게 나이를 묻는 건 예의가 아니죠!”라고 답했다. 수전은 그것을 보며 ‘요부’같았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꿈꾸던 바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여자”, 100퍼센트 여자를 보게 된다.(146쪽) 스테파니가 꿈꾸던 여자는 ‘노력’을 통해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완전한 해결책’이라고 말했던 수술도 했고, 오래된 습관도 버렸다. 스테파니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렇지 않으면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고, 소속감 없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전은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스테파니는 완전히 여자가 된 걸까, 아니면 완전히 여자처럼 된 걸까. 그리고 정체성에 대해 탐문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다면 흔히 국적, 직업 등에 대해 답할 것이다. 여기에 추가로 성별에 대해 언급한다면 거의 ‘여성’들일 것이다. 남성들은 자신을 ‘남성’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특정하지 않고,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남성은 늘 인간(Man)이라는 단어와 동급이었기 때문이다. 시몬드 보부아르가 말한 것처럼 “남자는 ‘주체’이고, ‘절대’이며, 여자는 ‘타자(他者)’”가 된다.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졌던 의문들과 차별들은 나를 구성한다. 남성들에 의해 위치지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개별 주체의 ‘나’를 이루는 것에 대해서는 전부 설명해 주지 못한다.
Stefanie Faludi. @Courtesy of Susan Faludi
수전은 자신의 정체성을 깊게 들여다보면, 유대인다움은 아버지의 침묵을 먹고,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어머니의 좌절을 먹고 자랐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성별을 선언함으로써 여성성의 표준을 폐기하며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무엇보다 교외 주택에서 벌어졌던 피의 밤, 어머니가 부당하게 ‘타락한’ 여자 취급을 당하고 아버지가 말도 안 되게 가정의 수호자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겪은 ‘정체성 위기’의 잔해, 남성적인 페르소나를 주장하지 못했던 좌절로부터 수전이 페미니스트로의 정체성을 이룩(99쪽)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수전은 개인의 역사, 모든 개인이 저마다 경험하는 특별한 투쟁, 실망, 삶에 대한 열망, 이 모든 것을 ‘정체성’이라고 이름 붙은 하나의 유리병에 깔끔하게 들어갈 수 없다고 본다. 정체성은 단순히 정의를 내릴 수 없고, 복잡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주변의 남성들에게 ‘남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 적이 있냐고 물으면 흔히 군대를 가야 할 때, 장남 또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주어질 때를 언급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을 요구받을 때 본질적인 질문을 그때서야 던져본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숙제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디폴트 값이기 때문에 정체성을 묻지 않는다. ‘여성’ 또는 ‘남성’이라고 바로 확답할 수 없는 이들은 더 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70년대 페미니스트 분리주의자들은 트랜스섹슈얼리티를 ‘프랑켄슈타인 현상’으로 여겼다. 이를 반박했던 샌디 스톤의 주장은 수전을 괴롭혔던, 스테파니가 회피했던 질문과 대면하게 한다. “트랜스섹슈얼들은 자기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은 자기들 삶을 말소의 연속이 아니라 차이를 재전유하고, 새롭게 조형되고 기입된 몸의 힘을 탈환하는 정치적 행위로서 기록하는 데서 출발한다.” 스톤은 그들에 대해 성별 이분법, ‘여성’ 또는 ‘남성’이 아닌 무언가 잡종적인 것으로 규정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성별 이분법 너머를 보는 것에 대해 “최고의 행위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자아 발견을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 나의 자아, 당신의 자아, 심오하고도 중요하게 우리가 누구인가를 발견할 수 있는 첫걸음 말이다”라고 강조한다. 두 개의 성만 존재하다고 믿는 이 세계에 근본적인 가정을 위협할 수 있는 것들은 그들이며, 비결정적이거나 다층적인 젠더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트랜스섹슈얼을 비난하는 말이었던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딱지는 그들에게 해방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230~231쪽)
그렇지만 ‘젠더 무법자’인 이들이 오히려 성이분법을 강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수술을 하고 오직 하나의 성별이 되려고 하는 욕망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계 최초 성전환수술을 한 남자로 알려진 에이나르 베게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대니쉬걸>을 보면서도 완벽한 여성성을 추구하려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이 기준도 결국 사회로부터 요구받아진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죽음을 예견하면서까지 수술을 통해 ‘진짜 여자’가 되고 싶어 하고, 수술 이후 “이제야 온전한 내 자신이 됐어”라고 말하는 에이나르의 표현은 스테파니의 대답과 겹쳐진다. “지금 이 모습이 아버지의 진정한 자아에요?”라고 묻는 수전의 질문에 “어어, 이건 지금의 나야. 수술 이후로 말이다. 나는 다른 인격을 개발해 왔단다”(570쪽)라며 서슴없이 답한다.
‘비정상성’을 의학의 기술에 빌려 증명해야 했던 트랜스젠더는 이렇게 ‘정상성’을 끊임없이 주장해왔다. 옮긴이의 말에서 손희정이 언급한 것처럼, 여성성과 남성성이 구성되는 만큼이나 트랜스젠더의 젠더 역시 구성이 되고 있다. 그래서 질문의 장에 올려놓아야 하는 것은 트랜스젠더의 젠더 수행이 아닌, 이 사회가 정상성의 경계를 긋고, 그 경계를 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633쪽)
‘비마자르인’ 이면서 ‘유대인’이었던 스테파니는 제복을 입고 비유대인으로서, 스포츠카를 몰고 1950년대 미국의 남성성을 수행한 것도 ‘존재’하기 위한 ‘패싱’이었다. ‘트랜스’되었던 이름과 국경, 성별은 그 경계 사이에서 재존재하기 위한 선택들이었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다시 흔적을 남긴다. 닫혀져 있었던 다크룸에서 수전은 아버지의 버려진 남성복들을 발견하며, “남성성의 무덤에 시체가 놓여 있었다.”(621쪽)고 표현한다.
조앤 스콧은 여성, 남성이라는 것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동시에 여러 가지 의미가 가득 차 있는 범주라고 인식함으로써 그 때서야 그 과정에 관한 역사를 쓸 수 있다고 말한다. 한 개인의 존재가 그러하듯 이분법이 아닌 여러 가지 교차성 속에서 재정의되고 재구축되어야 비로소 한 주체가 되어 그 문을 열고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