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가난의 문법>, <임계장 이야기>
‘신도시’로 이사 오면서 생애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나에게 서울에서 아파트는 절대 살아볼 수 없는 ‘부의 상징’이면서, 왜 저렇게 답답한 공간에 살아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그러나 현재는 아파트만이 가지는 장점에 익숙해지면서, 그 편안함과 익숙함이 무언가를 잊게 만든다.
택배를 주문할 때 수령할 곳의 옵션 중 ‘경비실’이라는 것이 하나 늘어났다는 것은 아파트에 살면서 느꼈던 편안함을 반증한다. 그제야 경비아저씨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울 주택가에서 살았을 때 자주 마주쳤던 폐지 줍는 노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인지하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 흔히 있지만, 비가시화된 존재들이다.
예전에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늙으면 나를 보살펴줄 자식도 없고, 무엇을 하며 먹고살지 모르겠다. 폐지 줍는 일을 하며 살게 될까 봐 두렵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우린 늘 안고 살아간다. 이 선배는 노후에 대한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기에서 ‘폐지 줍는 일’은 기피하는 ‘가난’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난의 문법> 책에서는 이렇게 ‘가난’의 대명사가 된 ‘재활용품 수집 노인’의 삶이 ‘개인적’이기만 한 것인지 묻는다. 실제이지만 실제이지 않는 폐지 줍는 여성 노인 ‘윤영자’가 등장한다. 저자는 ‘관찰자’이면서 ‘연구자’, ‘이웃’의 시선으로 그녀의 삶의 경로와 구조를 드러낸다.
저자가 여성 노인에게 포커스를 맞춘 것은 남성 노인의 ‘사회적 경로’와 다르게 결혼 이후 육아 중심의 ‘개인화되는 경로’를 따르는 ‘시대적’, ‘젠더적’ 배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노인들은 한국전쟁의 생존자이면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몸으로 견뎌온 산증인들이다. 특히, 이 시대를 겪어 온 여성 노인들은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고, 다자녀를 낳고 돌봄 노동을 하면서 특별한 다른 경력을 기를 수 없었다. 현재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있는 ‘윤영자’의 삶의 생애경로를 보고 있으면 평범하다. 어떤 특별한 이유로 가난 해졌다기보다는 흔히 있을 법한 일들의 연속이다.
이 책에서 언급한 한국의 노인 빈곤 통계를 잠시 살펴보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7년 기준으로 OECD 가입국가 가운데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17.4%로 미국의 17.8% 다음으로 높다. 게다가 65세 이상 노인만을 살펴볼 때,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43.8%다. OECD 가입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65-69세의 고용률에서 한국(45.5%)은 아이슬란드(52.3%)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고, 70-74세의 고용률은 33%로 OECD 가입국가 중에서 가장 높았다. 즉, 한국의 노인은 일을 많이 하는데도 빈곤하다는 뜻이며, 이는 현재 노인들 노후 생활의 경제적 기반이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노인이 하는 노동의 대부분은 질 낮은 일자리에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노인의 고용률이 상승한다 해도 빈곤율이 낮아지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가난의 문법>45쪽)
38년간 정규직으로 일하고 퇴직 후 ‘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라고 불리며 고된 노동 일기를 담은 책 <임계장 이야기>를 읽다 보면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까지 노후에 일을 해야 하며, 비가시화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가?
<가난의 문법>은 조금 담담하게 읽을 수 있지만, <임계장 이야기>는 절대 그렇지 못하다. ‘임계장’ 4년 차에 접어들었다는 저자가 그동안 일을 하며 틈틈이 메모해 두었던 수첩을 본 지인이 “가족들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마세요”라고 했던 말이 그것을 반증한다. 온갖 갑질과 횡포의 사건들 속에서 답답함과 분노로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부르는 “어이 임계장!”이라는 호칭은 바뀌지 않았고, 저자가 표현했듯, “이 고단한 이름은 수많은 은퇴자들이 앞으로 불리게 될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버스회사에서는 소화물을 싣다가 다쳐서 치료를 위해 무급 휴가를 달라는 말 한마디에 해고 통지가 이루어졌고, 빌딩에서는 본부장 사모님 차량을 몰라보고 호루라기를 불었다는 이유로, 아파트에서는 자치회장의 심기를 거슬려 잘렸다. 너무나 손쉽게 해고가 이루어지는 것은 그들이 ‘노인’이기 때문이다.
용역 회사는 재계약 때마다 잘못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본보기’로 꼭 한 두 명을 자른다. 그래야 다른 경비원들이 정신 차리고 일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임계장 이야기> 191쪽)
CCTV는 어느새 그들을 감시하고 있고, 다른 누군가로부터 감시 일지까지 적히고 있었다. 이런 ‘사소한’ 일들에 대해서 말이다.
저녁 식사 후에 슬리퍼를 신고 로비를 오갔다
지하 초소에서 신발을 벗고, 의자에 앉아서 근무했다
근무 중 정문의 경계석 돌에 기대었다…
최저 임금이 오르면서 7명이 하던 아파트 경비 일을 혼자서 하게 되는 ‘편법’도 아파트 경비 일에는 딱히 ‘기준’이 없다. 아파트 소장이 입버릇처럼 “병사가 전쟁터에서 갑옷을 벗고 푹 자도 되는가?”라는 말을 하고, 경비원은 경비복을 입고 비몽사몽 잠을 잔다. 그들이 휴게시간에도 안 쉬고, 일을 하는 이유는 그래야 ‘일 잘하는 경비원’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고, 다음에 재계약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5쪽)
작년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주민의 폭행과 갑질로 한 경비노동자가 세상을 떠난 사건이 이슈화가 크게 되어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는 계기는 되었지만, 금방 이런 문화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경비업법, 공동주택관리법 등 법의 개정과 보완도 시급하다.) 큰 폭행만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것부터 이미 가해는 시작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임계장 이야기> 저자는 교회에서 성탄 메시지를 들었던 장면을 회상하며 이런 문장을 남긴다. “‘사회적 약자들도 인간적 품위를 보장받는 나라’라는 구절이 가슴에 박혔다. 그러나 내가 ‘인간적 품위’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 ‘최소한의 생계비를 벌 수 있는 나라’를 원했을 뿐이다.” (195쪽)
다시 돌아가 질문을 던져보면 노인은 왜 일을 할 수밖에 없는가? <가난의 문법> 저자도 언급했듯이, “이제 사회는 예전의 ‘마을’이 아니며 더 이상 노인과 청년과 아이가 서로 지식을 공유하고, 지혜를 나누던 공간이 아니다. 더욱이 끊임없이 변화하여온 기술 환경은 노인의 지식을 구닥다리 지식으로 치부하게 하였고, 노인들의 쓸모가 사라졌다.” (51쪽)
그리고 ‘자립’의 개념을 가지고 온다. 신체적 능력이 떨어지고, 극단의 노동 상황 속에서는 ‘자립’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근이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자립보다, 함께 모여 서로에게 의존하는 자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조문영의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 왔는가>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립이란 개인의 독존이 아닌 상호의존을 기초로 해야 하고, 자립을 탈구축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229쪽)
“65세 때, 어느 손잡이를 잡으시렵니까?” (국민연금관리공단의 광고공모전 최우수 수상작) 잠시 이 포스터의 이분법의 구도 속에서 아래를 가리키는 나의 내면을 발견하며 나 또한 다른 삶의 모습에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빚에 허덕이면서도 아파트에 살다 보니 가끔은 내가 ‘중산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아침에 출근차량이 빠져나갈 때 경비 아저씨로부터 인사를 받으면서 나도 모르게 ‘우위’에 서 있는 듯한 나의 그 감각을 경계해야 한다. 노후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도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하고 내뱉는 무의식적 발화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자꾸 놓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 도시에서 ‘공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