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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날 막힌 변기를 뚫어서 다행이다

by zino

놀랍게도(!) 변기가 막힌 것은 지난주의 일이다. 사실 그런 일은 너무나 일상적으로 벌어지기도 하니 사건이라고 부르기엔 무색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문제라고 할 만한 난해한 상황이 있었다. 먼저, 작년에 이사를 하면서 일명 ‘뚫어뻥’, 압축기를 버리고 왔다. 상당히 고마운 존재였지만, 변기 물속으로 왔다갔다한 그것을 다른 짐들과 몸 비비며 부대끼게 두는 것은 내 느슨한 결벽증으로는 도통 견뎌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하필 이사를 온 동네는 ‘차로 마트가 5분, 10분’인 곳이었다. 그렇게 보면 가까운 듯하지만, 그 거리를 걸어서 가면 아파트 입구에서 마트 입구까지 편도 35분 내지는 40분 정도가 걸린다.


압축기 하나 사자고 옷을 갈아입고 차를 몰고 나설 일인가. 다행인 건지 막힌 변기의 상태는, 혼돈이 아니라, 내려가야 할 것들은 이미 내려간 상태로, 못 볼 꼴은 아니었다. 게다가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오래 전부터 대한민국에서 지어지는 아파트는 화장실이 2개인 경우가 부지기수라 전형적인 아파트에서는 이런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가 가능했다. 그래서 일단은 있는 걸 동원해서 인터넷을 뒤져가며 변기를 뚫어보기로 했다.


1) 배관 세정제를 들이붓고 기다렸다가 물을 내린다. - 실패했다.

2) 세제를 들이붓고 기다렸다가 물을 내린다. - 실패했다.

3) 세제를 들이붓고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렸다가 물을 내린다. - 실패했다.


이 세 가지 방법을 며칠 동안(!) 돌아가면서 해 봤지만 돌아가면서 실패했다. 그 와중에도 마트는 가지 않았다. 귀찮음은 없던 비위도 샘솟게 한다.


결국 집 밖에 나갈 일이 생겼다. 동짓날, 팥죽을 잔뜩 먹고, 5일 만에 신발을 신고, 나간 김에, 일을 몰아치기로 다 보고, 집에 오는 길에 드디어(!) 마트에 들렀다. 압축기를 사야 한다. 집에 새 물건을 들일 때에는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압축기들을 꼼꼼히 살펴봤다. 자루가 너무 긴 건 걸리적거리고, 피스톤 방식으로 펌프질을 하는 건 배관에 무리가 갈 것 같기도 하다. 무려 일만 일천 원짜리는 거치대가 있어서 심히 탐이 났지만 저걸 사 가면 경제관념이 없다며 등짝 스매시를 당할 각이다. 3,760원짜리 이중 압축기를 골라 들고 만원 지하철을 타고 귀가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일단 화장실로 갔다. 몇 번의 펌프질로 해결될 것이라는 상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팔 전체의 근육을 성나게 하면서 압축기를 눌러대도 좀처럼 물은 내려가지 않고, 그동안 들이부은 세제 덕에 거품만 한 가득 올라왔다. 팔에 체중을 실어가면서 한동안 압축기와 변기와 씨름한 끝에 드디어 변기 안 쪽에서 반가운 소리가 올라왔다. 변기를 뚫었다.


예전에 EBS에서 방영한 다큐 시리즈에 마이클 셔머 선생님이 나오셔서 패턴성과 행위자성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본 적이 있다. 행위자성을 좀 빌리자. 변기가 막히고 마침 동짓날 그걸 뚫어 낸 건 우연이 아니다. 이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할 동지,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동지, 액운을 물리칠 동지. 이제 묵은 고민과 인생의 체증은 다 밀려 사라질 것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물이 쑥쑥 내려가는 변기. 며칠 동안 마음앓이를 하던 일이 있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계시를 받았다, 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침, 동짓날 변기를 뚫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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