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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o Dec 24. 2021

동짓날 막힌 변기를 뚫어서 다행이다

놀랍게도(!) 변기가 막힌 것은 지난주의 일이다. 사실 그런 일은 너무나 일상적으로 벌어지기도 하니 사건이라고 부르기엔 무색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문제라고 할 만한 난해한 상황이 있었다. 먼저, 작년에 이사를 하면서 일명 ‘뚫어뻥’, 압축기를 버리고 왔다. 상당히 고마운 존재였지만, 변기 물속으로 왔다갔다한 그것을 다른 짐들과 몸 비비며 부대끼게 두는 것은 내 느슨한 결벽증으로는 도통 견뎌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하필 이사를 온 동네는 ‘차로 마트가 5분, 10분’인 곳이었다. 그렇게 보면 가까운 듯하지만, 그 거리를 걸어서 가면 아파트 입구에서 마트 입구까지 편도 35분 내지는 40분 정도가 걸린다.


압축기 하나 사자고 옷을 갈아입고 차를 몰고 나설 일인가. 다행인 건지 막힌 변기의 상태는, 혼돈이 아니라, 내려가야 할 것들은 이미 내려간 상태로, 못 볼 꼴은 아니었다. 게다가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오래 전부터 대한민국에서 지어지는 아파트는 화장실이 2개인 경우가 부지기수라 전형적인 아파트에서는 이런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가 가능했다. 그래서 일단은 있는 걸 동원해서 인터넷을 뒤져가며 변기를 뚫어보기로 했다.


1) 배관 세정제를 들이붓고 기다렸다가 물을 내린다. - 실패했다.

2) 세제를 들이붓고 기다렸다가 물을 내린다. - 실패했다.

3) 세제를 들이붓고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렸다가 물을 내린다. - 실패했다.


이 세 가지 방법을 며칠 동안(!) 돌아가면서 해 봤지만 돌아가면서 실패했다. 그 와중에도 마트는 가지 않았다. 귀찮음은 없던 비위도 샘솟게 한다.


결국  밖에 나갈 일이 생겼다. 동짓날, 팥죽을 잔뜩 먹고, 5 만에 신발을 신고, 나간 김에, 일을 몰아치기로  보고, 집에 오는 길에 드디어(!) 마트에 들렀다. 압축기를 사야 한다. 집에  물건을 들일 때에는 신중하지 않으면  된다.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압축기들을 꼼꼼히 살펴봤다. 자루가 너무   걸리적거리고, 피스톤 방식으로 펌프질을 하는  배관에 무리가   같기도 하다. 무려 일만 일천 원짜리는 거치대가 있어서 심히 탐이 났지만 저걸  가면 경제관념이 없다며 등짝 스매시를 당할 각이다. 3,760원짜리 이중 압축기를 골라 들고 만원 지하철을 타고 귀가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일단 화장실로 갔다. 몇 번의 펌프질로 해결될 것이라는 상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팔 전체의 근육을 성나게 하면서 압축기를 눌러대도 좀처럼 물은 내려가지 않고, 그동안 들이부은 세제 덕에 거품만 한 가득 올라왔다. 팔에 체중을 실어가면서 한동안 압축기와 변기와 씨름한 끝에 드디어 변기 안 쪽에서 반가운 소리가 올라왔다. 변기를 뚫었다.


예전에 EBS에서 방영한 다큐 시리즈에 마이클 셔머 선생님이 나오셔서 패턴성과 행위자성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본 적이 있다. 행위자성을 좀 빌리자. 변기가 막히고 마침 동짓날 그걸 뚫어 낸 건 우연이 아니다. 이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할 동지,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동지, 액운을 물리칠 동지. 이제 묵은 고민과 인생의 체증은 다 밀려 사라질 것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물이 쑥쑥 내려가는 변기. 며칠 동안 마음앓이를 하던 일이 있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계시를 받았다, 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침, 동짓날 변기를 뚫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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