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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o Dec 27. 2021

작은 인간과의 조우

  , 친척댁에 작은 생명체가 하나 합류했다. 어느새  생명체는 꼬물이에서 작은 인간으로 성장했다. 요즘의 트렌드에 따라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작은 인간은 이제는 주변의  인간들에게 나름대로의 역할을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엄마, 아빠, 어리광을 받아주는 사람, 아기처럼 예뻐해 주는 사람, 장난감 주는 사람, 그리고 올라운드 놀이 상대. 그것이 바로 나다.


사실 작은 인간과 나는 가장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5촌 사이인 우리는 서로 간에 통화를 하는 일도, 가족여행을 함께 한 적도 없었다. 작은 인간의 가족은 가장의 일 때문에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었기에 자주 만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올해 여름, 겨우 온전히 하루를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을 정도다.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작은 인간이 애초에 나를 놀이 상대로 지목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하고 싶은 놀이를 이 사람과 저 사람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배운 자의 진가를 보여주지.


작은 인간과의 놀이에 임하면서  가지 전략을 세웠다. 먼저, 주도권을 ‘대놓고쥐지 않는다. 작은 인간이 어떤 상황을 제시했을 , 조금씩 변주를 주지만 항상 결말은 작은 인간이 내리게 했다. 다음으로, 작은 인간의 말을 반복하되 지시대명사는 지양하고 의성어  의태어를 보탠다. 예를 들어, “토끼가 뛰어.”라는 말에 “토끼가 깡총깡총 뛰는구나.”는 식으로 반응했다. 결정적으로, 반복되는 놀이에 작은 인간이 질릴 때까지 동참한다. 마치 무한궤도 위에 올라선 것만 같았던 놀이의 순환에서도 “그만 하자.”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것은 지나치게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그날 나는 작은 인간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버렸다. 추석에 친척댁에 방문했을 , 작은 인간은 나를 반겼고 그날 우리는 같은 놀이를 -내 체감상- 족히 100번 이상은 한 것 같다. 체력이 다 떨어진 나는 다음날, 할 일도 많았건만, 자리보전했다. 얼마 전, 작은 인간네는 먼 지역에서 멀지 않은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집들이에 초대받아 가는 길에 작은 인간이 나와 놀 계획을 세워뒀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 나는 화장실에 갔다가 언제 나오냐며 문 앞의 작은 인간에게 다그침을 당했다.


그래서 나는 작은 인간들이 “좋은 사람을 알아본다.”라고 하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나는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작은 인간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실증적 접근을 했을 뿐인데 간택당해 버렸다. 작은 인간은 자기 취향을 충족해 주는 큰 인간에게 끌리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본위의 욕구에 충실한데도 귀여움을 받다니, 인간의 진사회성(eusociality)은 기묘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성탄절, 친척댁에 방문한 작은 인간이 내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자 발을 쿵쾅대며 성냈다는 전언을 들었다. 작은 인간이여,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다가 내가 체력을 기른 후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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