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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o Dec 31. 2021

동물농장 - 조지 오웰 지음, 최희섭 옮김

우음마식(牛飮馬食) - 책 이야기



대학생 시절, 강의명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공동체주의'에 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기말고사 문제 역시도 정확히 생각나진 않지만 대략 '모두가 평등한 공동체는 가능한가'에 대해 논술하는 것이었다. 문제를 받고 답안을 작성해서 보내야 할 때가 다가오는데 몇 날을 고민해도 도통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끙끙 대던 나는 마지막 날 논설문 대신 짧은 이야기를 써서 답안을 제출했다.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나는 죽어서 천국에 간다. 천국에서 내게 주어진 보상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이다. 나는 소위 3J, 그러니까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제니스 조플린을 모셔와 자유롭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 셋 중 누구도 우위에 있지 않고 자유롭게 연주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이는 누구나 와서 감상할 수 있다.

한동안은 별 탈 없이 사회가 돌아간다. 하지만 이내 3J의 팬들이 갈라져 싸우기 시작한다. 각각 자신이 숭앙하는 뮤지션이 최고라는 것이다. 정작 뮤지션들은 다툼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팬들 사이의 갈등은 심해져 급기야 폭력 사태로 번진다. 

그 사회의 설계자인 나는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갈등을 가라앉힐 방안을 모색하다가 사회의 중심은 지미 헨드릭스라고 공표한다. 구성원들을 결집시킬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에 반대하는 이들을 사회에서 이탈한다. 그중 과격한 이들은 심한 공격을 가해오기도 한다. 나는 뮤지션과 구성원들의 보호를 명목으로 담을 쌓고 무장한 경계 인원을 배치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사회 중심은 지미 헨드릭스로, 그 사회를 운영하는 권력자는 나 자신으로 하여 체계를 공고히 해 나간다.


이 이야기의 요지는 모두 평등한 공동체는 성립되기 어려우며 공동체 성립을 위해서는 내부의 구심점이 있어야 하고 외부의 적에 의해 구성원들의 단결과 권력이 집중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이 기말고사 답안을 작성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렇듯 공동체 혹은 사회에 대한 진단은 내렸지만 그에 대한 정치적 견해나 도덕적 판단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다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다분히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쓴 소설이다.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익히 인정하고 있다시피 이것은 [동물농장]의 미덕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정치적 함의는 슬프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등장동물이라고 해야 하나?)인 나폴레옹(이름만으로도 많은 점을 시사하는 듯하다)은 스탈린을 모방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동물농장의 소요 또한 러시아 혁명을 통해 이룩된 소비에트 연방을 비유한 것이라 회자된다. 즉 [동물농장]은 실패한 소련 공산당 독재를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우화로 받아들여진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동물농장]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나폴레옹의 행실(?)과 동물동장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소련에 국한시키는 행위는 [동물농장]이 말하고자 하는 독재, 더 정확히 말해 자유의 억압을 과거의 한 시점에 묶어 버리려는 것이다.


이런 과오는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한 시대, 한 국가, 한 개인의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자 하는 행위는 현재를 낭만적으로 소비하려고만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직설적으로 말해 현재는 과거의 냉전시대와 다르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더 나쁠지도 모른다. 과거에 일어났던 정치적 소요 사태에서는 독재자와 그의 공과가 비교적 명확히 드러났다. 그렇지만 현재의 정치적 주동자('지도자'라든지 '지도층'이라는 말은 감히 사용할 수가 없겠다)들은 대중을 향해 끊임없이 공포를 조장하고 적을 만들어낸다. 공동체의 적과 그가 자아내는 공포는 사라진 스노볼의 존재처럼 허상에 불구하지만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야 하는 지금이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문제는 다수의 시민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선량하다는 데서 발생한다. 충직하고 강인한 말인 복서처럼 우리는 공동체의 영광과 미래를 위해 의문을 접어두고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런데 얼핏 미덕이라고 보이는 바로 그 '선량함'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공덕을 내세우지 않는다. 누구도 칭송하지 않기는 하지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찬양에 비난을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공동체를 위협하는 공포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겸손함, 순진무구함, 성실함과 같은 덕목들이 우리를 역사의 오점에 공범자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동물농장]은 이런 모순 아닌 모순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 그것도 매우 이해하기 쉬운 우화의 형실을 통해서 말이다. 조지 오웰은 역사의 강간자가 되는 오명을 뒤집어쓸지언정 형체 없는 공포에 굴하지 않은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럼 이제, [동물농장]의 충격적인 결말, 돼지가 인간이 되고 인간이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을 통해서 던지고 싶었던 질문이 아니었을까.


"자, 이제 어떻게 살겠소?"


현대에는 권력에 호도되지 않도록 특히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강조한다. 나 역시 그 중요성에 대해 매우 공감하지만 동시에 부족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는 복서 그리고 나와 같은 보통의 일꾼을 타자화시키는, 그러니까 현상에서 소외시키는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동시에 우리는 자유의 의미와 범주를 재확대시켜 굴복되지 않을, 의지를 펼칠 자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허울만 좋은 묘비의 주인이 되거나 돼지가 되거나 돼지가 된 인간이 될 뿐이다. 마지막으로, 아마도 조지 오웰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을 말을 내 마음대로 추측해서, 스테판 에셀의 입을 빌어 말해보려 한다.


"분노하라."


다만 분노의 대상을 오인하지 말자.



사족1 - 나는 '펭귄클래식 코리아'의 [동물농장] 번역본을 읽었다. 소설 뒤에는 초판에 실릴 예정이었지만 싣지 않았고 나중에 발견된(;;) 조지 오웰의 서문이 실려 있었다. 이 글은 내가 읽은 글 중 거의 최고의 명문에 해당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마음에 내리 꽂혔다. 1900년대 중반의 영국 사회가 대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유효한 내용인데 그중 정말 마음이 쨍하게 쳤던 구절.

"관용과 품위는 영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려 있지만, 이것들은 파괴될 수 없는 것이 아니기에 부분적으로는 의도적으로 노력하여 그 정신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사족2 - 이 글은 흥분해서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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