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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o Jan 09. 2022

티벳밀교 - 출팀 깰상/마사키 아키라 저, 차상엽 역

우음마식(牛飮馬食) - 책 이야기


어린 시절, 엄마는 꽤나 엄했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 자식이 소위 '문화생활'을 즐기는 데에는 상당히 유연한 면모를 보여 줬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어린이용 TV 만화는 물론이거니와 '주말의 명화', 각종 TV 외화 시리즈, '그것이 알고 싶다' 거기에 더해 온갖 책, 만화책, 심지어 [마루타]와 같은 소설, 영화까지 섭렵하는 꼬맹이-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덕분에 나는 지금의 엄마는 이해하지 못하는 '난잡하고 난해한 취향'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했다. 


엄마가 씨를 심고 내가 잘 키운 취향(?) 가운데 하나가 '밀교'다. 어린 내게 밀교를 각인시킨 세 가지가 있다. 제목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지만 [세계의 미스터리 백과] 뭐시기, [공작왕](해적판이었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어린이에게 유해한 장면은 싹둑싹둑 잘려 있었을 듯), [퇴마록]. 어디선가 엄마가 빌려와서 던져준 이것들을 보고 난 후 부족한 기억용량에도 불구하고 밀교라는 건 놓을 수 없는 호기심거리가 되었다. 가칭 [미스터리 백과]에는 라싸에 있는 포탈라 궁의 지하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그곳에는 누구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지하가 있는데, 높은 스님이 가 보신 후 그곳에는 세계를 멸망하게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으니 절대 발설하지도 말고 접근하지도 말라며 봉인했다는 이야기. 꼬맹이 주제에 종말론에 진지했던 나는 그때 '티벳'을 기억에 새겨 두었다. [공작왕]과 [퇴마록]에서는 밀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각종 술법에 홀딱 반했다. 밀교는 내게 '신비스러운 힘으로 세계 종말의 비밀을 지키는 이들의 집단' 정도로 여겨졌다.


그 후 시간이 훨씬 더 지난 후, 밀교는 불교의 한 부류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신비주의'에 대한 인상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밀교에 대한 호기심도 놓지 못했다. 얼마 전, 어디에선가 밀교(Tantrism)야말로 대승불교의 정점이라고 하는 구절을 읽었고 새삼스레 밀교를 잘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연말연시를 맞아 나에게 선물을 하고 싶기도 했고, [티벳밀교] 책을 구입해 오랜만에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해 읽기 시작했다. 


'티벳밀교'에서 티벳이라는 지명이 나오지만, 이것은 중국 내의 티베트 자치구 지역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인도의 시낌(Sikkim)이나 라다크(Ladakh) 등 티벳불교, 티벳밀교 문화권 전역을 포괄하는 용어로 티벳밀교를 이해해야 마땅할 듯하다. 티벳밀교 역시 불교에 속하므로 기본적으로는 깨달음에 따른 해탈(nirvana)을 이루는 것이 지고의 목표이다. 티벳불교를 이루는 또 다른 축인 현교(顯敎)와 밀교(密敎)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성적 요가(性的 瑜伽)를 수행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밀교는 성행위를 도입한 요가를 허용하고 있다. 그것은 명시된 계율과는 사뭇 다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가르침은 매우 수승한 스승과 제가 사이에서만 조심스럽게 이어져 왔고 그래서 바로 '밀교'라는 형식이자 정체성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고 삿되어 보이기도 할 법한 이야기다. 보통 '높은 경지'라고 한다면 일체의 감각적 쾌락에 휘둘리지 않거나 혹은 그것을 억제한 상태라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성행위는 쾌락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점이 '공(空)'과 상충한다고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은 모든 감각 등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티벳밀교의 최대 교파인 겔룩(dGe lugs, 德行)파의 시조인 쫑카빠(Tsong kha pa, 1357-1419)가 설한 공성(空性)의 간략한 내용을 옮겨 보자.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존재하는 것은 공(空), 즉 실체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라만상이 공이라고 해서 무(無)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공성은 원인(因)인 동시에 결과(果)로 존재한다."(p.77)


공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있는 상태가 아닐까. 실제로 수행 중에는 지복이라고 할 만한 쾌락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내 '매우 드문드문'한 티벳불교 접촉기 가운데, 운이 좋게도,  밀교 수행의 입문과정인 관정(灌頂)식에 참여한 일이 있다. 결코 영성이 탁월한 인간이 아닌데도 그 과정에서 찰나이긴 했지만 빛에 녹아드는 듯한 '체험'을 했고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면 '우주의 합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느낀 강렬함은 지고의 쾌락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알고 보니 그건 수행의 낮은 단계에서 이루어질 만한 것이고 그 쾌락을 깨달음이라고 하거나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하수라고 하더라. (하핫..) 하지만 깨달음이 단계로 나타날 수 있고, 상위의 단계는 하위의 단계를 버리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공이 쾌락을 배척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하니 "수행자는 절대의 쾌락 중에서 최고의 지혜를 획득하고 해탈을 이룬다"(p.22)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티벳밀교가 성적 요가만이 깨달음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해탈에 이르는 데 현교의 방식보다 밀교의 방식이 수승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이는 소수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밀교 및 밀교 수행에 입문하게 되는 자는 현교와 경전의 가르침을 성실히 따르고 그것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선택받은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밀교 수행 가운데 얻게 되는 일종의 초능력(!)과 쾌락에 현혹되면 수행은 진전되지 못한다는 경고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티벳밀교]에서 소개하고 있는 밀교의 수행법을 읽다 보니 흥미진진이라는 생각과 함께 '폐인을 생성하는 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티벳밀교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성적 요가는 실제 살아 있는 파트너와 하는 성행위가 아니라 관상을 통한 행위라고 하는데도 그렇다.)


그런데도 왜 티벳밀교에서는 성적 요가가 하나의 수행법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탄트리즘이 궁극적으로 대승불교에 속한다는 것과 티벳밀교에서 성적 요가가 "수행자의 생명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p.163)라는 설명에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불교에서 지향하는 지고의 목표는 해탈이다. 그리고 '대승'이라는 말이 붙으면 '함께' 해탈을 하자는 점이 좀 더 강조되는 것 같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자력으로 공성을 깨닫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렇게 할 마음을 내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먼저 깨달은 이들, 즉 부처나 보살이라고 칭해질 분들은 이미 해탈의 길에 올라섰지만 혼자 갈 수는 없으니 중생들이 그 길에 함께 올라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건 혼자서는 돌아 누울 수도 없는 아가를 적어도 자기 앞가림은 할 정도로 성장할 때까지 돌보아 주는 것에 비유할 만하지 않을까. 무지막지하게 힘들 것 같다. 그러니 보다 많은 중생을 구제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법력을 가진 스승님은 필연적으로 그것을 유지하고 실천하기 위한 생명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한 마디로 밀교의 가장 어렵고 위험하고 강력한 수행법은 모든 중생을 깨달음을 이끌기 위한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티벳밀교]를 읽으면서 이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티벳밀교에 대한 신비로움은 조금 덜해지고 보살행에 대한 경이로움은 심히 더해졌다. 하지만 이번 독서에서 얻은 최대의 소득은 따로 있다. 티벳밀교의 역사와 수행을 찬찬히 따라가면서 공과 연기에 대해 나름의 해석을 내리게 되었다. 어쩌면 공은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상태에 놓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모든 것이 '적절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고 그 적절함은 가장 적합한 연기에 의해 발생하지 않을까. 그러니 공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모두가 모두에게 의존적인 상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만물이 무상하다고 하고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그것이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쥐꼬리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나는 나를 키우기에도 벅차'류의 인간인 내게 보살행을 더욱 요원하게 느끼게 해 준 [티벳밀교]. 동시에 허블 망원경으로 심우주를 보는 것처럼 이라도 그 신비로운 세계를 보고 알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 해 준 책이기도 하다. 티벳밀교에 대한 호기심을 조금은 채우고 한편으로는 한껏 부풀린 선물이다.



사족 - 이 책은 '교양학술서'로 분류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엄청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문장이 있었다. "힌두교가 아직 손을 뻗치지 않은 영역에 먼저 촉수를 뻗는 것이었다."(p.15)가 그것. '촉수를 뻗는'다니! 이런 류의 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력에, 이미 초반부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더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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