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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o Jan 14. 2022

공정함에 대한 선천적 감각

이미 고릿적에 '어른'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어른이 되어서 유별나게 좋은 점은 그다지 없어 보이긴 하다. 그래도 소소하게 좋은 점은  가지 꼽아볼  있을  같다. 그중 하나는  먹을   편식을 해도 괜찮다는 거다. 어렸을 때에는 '골고루 먹고 튼튼하게 자라라' 애정이 가득 담긴 식단 덕분에 (지금 생각하면) 없는 살림에도 영양소가 고루 분포된 밥상을 받았다. 지금은  자라나서인지 손이 가는   개의 반찬, 혹은 하나의 요리로 식사를 해도 잔소리를  듣는 편이다.


먹지 않을 것 같은 음식이나 반찬을 상 위에 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미안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한테냐면, 밥상을 차려준 사람이 아니라 상 위에 올라오는 음식이나 반찬들에게 그렇다는 거다.


어렸을 때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맛이 있고  먹는 음식이 있었다. 당연히 싫어하는 맛과  먹지 않는 음식도 있었다. ‘튼튼하게 자라렴’이 모토인 엄마는 내가 좋아하든 말든 성장기 어린이에게 좋은 음식을 정성스레 차려내는 편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에 수저질을 2-3 하는 동안 싫어하는 음식에는 1번을 할까 말까였다. 그것이 고뇌의 원인이었다. 일단  위에 올라온 음식은 '먹여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나는 그것을 먹지 않고 있거나 '차별대우' 하고 있으니 못할 짓을 하는 느낌을 받기 일쑤였다. 예를 들어, 달걀 후라이를 마주하면 노른자에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미안해..'라고 읊조리면서 흰자만 발라먹었다.


그런  보면 공정함에 대한 감각은 타고나는 면이 있는  같다. 어린 시절, 나는 차별을 받거나 부당한 대우 때문에 치를 떨거나 하는 일도 없었는데 '다르게 대우한다' 것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아무래도 유덕함과도 관련되어 있어 보인다. 음식은 '인간에게 먹여져 그에게 영양분을 제공하며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는 것이 목적이다. 씹어 먹어 없애 버린다는 점에서 잔인하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어린이나는 음식은 '당연히' 먹어져  역할을 하는 것을 기꺼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음식에게 주어진  목적을 달성했을  음식의 덕은 성취된다고   있을 거다. 내가 음식을 먹지 않았을  모종의 죄책감을 느꼈던 것은 음식이 해야 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흉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결국, 다르게 대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공정함에 대한 감각은 자신의 역할과 목적을 다해 유덕함을 성취할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직관적인 판단에 달려 있다고 말해야   같다. 나아가 그건 아마 그런 판단을 내리는 당사자가 대상이 되는 사람 혹은 사물과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가능할 거다. 여기에 권력관계가 개입한다면 권력이  쪽은 제한된 기회를 제공하는 것조차 권력의 선의나 호의로 생각하게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닌  아니라, 음식에 대해 사과를 하던 어린 나는 '의인화의 오류' 심각하게 빠져 있었다. 음식이 마치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대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런 성향을 미처 다 버리지는 못했다. 벽에 있는 2개짜리 콘센트에 번갈아 가며 플러그를 꽂고 있다. 광범위한 의인화는 유아기의 특징이라고 했던가… 유아기에서 탈피하지 못한 걸 공정함에 대한 민감성으로 포장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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