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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 작가 진절 May 01. 2020

무한도전에 담긴 기호학

천재 김태호 PD의 끝은 어디인가?

5년 전에 써 놓은 글을 우연히 발견하여,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뒤늦게 한 번 올려본다. (2015년에 쓴 글)




2005년에 ‘무모한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방송 전파를 탄 이후 지금의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기까지 무려 10년의 세월 동안 정상을 지키는 최장수 예능 프로그램이 되었다. 2005년 당시 리얼 버라이어티가 다소 생소했던 시기에 본격적인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 탄생을 했고, 이후 ‘1박 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 ‘런닝맨’ 등의 유사한 프로그램이 탄생하면서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의 부흥을 이끌었다.


방송 초기에는 황소와의 씨름이나 지하철과의 달리기 시합과 같이 현실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다소 무모한 상황을 설정하여, 황당한 도전을 통해 정통 슬랩스틱 방식의 유머를 구사하는 방식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사실 초기만 해도 지금과 같은 ‘팬덤’이나 ‘신드롬’을 만들어 낼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2기 '무리한 도전+퀴즈의 달인'을 거쳐 2006년 3기 무한도전이 시작되면서 무한도전의 황금기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된다.


이때부터 무한도전은 특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고, 매주 새로운 주제, 새로운 포맷,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키며 리얼 버라이어티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더 재미있고, 시청률도 높고, 강력한 한 방을 가진 예능프로그램들이 속속 등장을 하지만 결국 오래가지 않아 인기가 점차 하락하다, 이내 폐지에 이르게 되는 프로그램들이 부지기수이다. 과연 무한도전의 무엇이 여타 예능 프로그램들과의 차별화를 만들었을까? 어떤 부분에서 수많은 ‘팬덤’과 ‘신드롬’을 만들어지며 장기 집권하는 계기가 되었을까?


이는 바로 기호학적인 관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수 있다. 쉽게 말해 프로그램에서 표면적으로 보이는 다양한 콘텐츠 자체의 파워와 출연진들의 무게감만으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는 김태호 PD가 가진 통찰력과 추진력을 통해 프로그램의 요소요소에 혹은 프로그램 전체적인 내러티브 속에 함축적이고, 은유적이며, 날카로운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숨겨 놓고, 이를 찾는 시청자들과 끊임없는 숨바꼭질을 하며, 또 다른 반전과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는 게 무한도전이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2009년경에 영화 페르마의 밀실을 패러디한 ‘패닉룸’ 특집이 방영되었는데, 이야기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무한도전 멤버들을 한 공터에 마련된 컨테이너 박스에 밀어 넣고, 문제를 내서 못 맞추거나 틀릴 때마다 컨테이너를 5M씩 위로 띄워 올리는 구성이다. 문제를 맞히는 과정에서 멤버들의 엉뚱한 오답을 통해 웃음을 주고, 외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모니터를 통해 멤버들의 공포감이 극대화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슬랩스틱으로 또 한 번 웃음을 주는 평범한 특집으로 여겼던 시청자들은 마지막에 엄청난 트릭이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되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사실 컨테이너 박스는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고, 제작진의 컨테이너 흔들기와 미리 찍어놓은 영상 모니터를 통해 실제로 올라가고 있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고 멤버는 물론 시청자들도 제작진의 트릭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이 특집에 숨겨진 진짜 메시지는 따로 있었다. 바로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일반 시민들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실제로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불편한 진실을 아주 재치 있고 위트 있게 표현한 것이다.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대표적인 보수 언론사의 종편 출범 등에 맞춰서 왜곡된 시선을 가진 미디어가 얼마나 일반 서민들에게 편향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경고를 울려주는 아주 의미 있는 특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얼마 후 무한도전에서는 ‘TV전쟁’이라는 또 한 편의 특집을 통해서 시청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송의 민낯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셀프디스’ 방송을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1년에는 더욱더 강력한 메시지를 가진 ‘스피드’ 특집을 방영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무한도전의 단골 메뉴인 추격전의 스케일을 키운 정도의 업그레이드 버전 정도로 생각했으나 시청자들이 직접 프로그램 속 요소요소에 숨겨진 메시지들을 스스로 하나씩 밝혀내면서 오히려 방송 이후에 더 큰 화제가 되었던 특집이다. 우선 멤버들은 1964년식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미션을 시작하는데, 1964년은 한일수교의 해를 의미한다. 무한도전 멤버들의 차를 쫓는 적들의 차로 나온 2대의 차는 바로 일본 극우단체를 후원하는 ‘토요타’와 ‘닛산’의 차였고, 국회 도서관에서 찾은 811.15.ㅎ155라는 숫자는 고은 시인의 ‘한일 시선집’이라는 시집을 가리키는 암호였으며, 두 개의 가방 비밀번호인 799, 805는 독도의 우편번호였다. 또한 틀린 그림 찾기에 나온 SEA OF JAPAN라고 적힌 지도를 보여주며 ‘다른’ 그림찾기가 아닌 ‘틀린’ 그림찾기라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강조하고, 마지막에 등장한 비밀요원은 바로 수년간 독도지킴이로 왕성한 활동을 해온 김장훈으로 전체 이야기 속에 한일관계와 독도의 이야기를 숨겨 놓는다. 이 특집 이후에 웬만한 정치인보다 무한도전이 더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웰메이드 특집으로 회자되고 있다.


2015년 2월에는 또 한 편의 사회 풍자 예능이 한편 소개가 되는데, 바로 ‘끝까지 간다’ 특집이다. 추격전의 최종 경품은 역대 최고의 상금. 멤버들은 최선을 다해 뛰어다닐 수밖에 없게 되는데, 여러 겹의 상자가 들어있는 상자의 뚜껑을 열면 열수록 상금은 점점 커져가지만 그에 반해 나머지 멤버들의 통장 잔액이 1/N로 차감이 된다. 결국 마지막 상자를 열게 된 사람도 전 단계에서 얻은 빚을 탕감하면 결국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게 되고, 나머지 멤버들은 빚만 잔뜩 쌓인 채 추격전을 마무리하게 된다. 멤버들은 항변했으나 시작하면서 찍은 계약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아주 자세하게 명기되어 있어, 꼼짝 못 하고 금액을 물어주게 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특집이 방영될 당시 정부에서 연말정산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꾸면서 혜택이 늘어났다고 설명하지만 실제로 혜택이 축소되거나, 오히려 추가 납부하는 직장인들이 늘어나면서 여론이 상당히 악화되었던 시기였다. ‘갑’의 횡포에 항변하는 서러운 이 시대의 수많은 ‘을’ 들. 그러한 ‘을’들을 계약서로 압박하며, 달콤한 설탕 발림으로 유혹하는 ‘갑’, 그런 유혹에 또다시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을’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꼬집으면서 많은 사랑을 받게 된 특집이다.


이 밖에도 수없이 많은 김태호 표 사회 풍자 예능이 있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위험성과 경각심을 예능적으로 유쾌하게 풀어내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나비효과’ 특집, 故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모티브로 뉴욕 도심에서 추격전을 펼친 ‘GANGS OF NEWYORK’, 획일적인 가요 시장과 표절 시비 등에 대한 풍자를 담은 박명수의 ‘어떤가요’ 특집, 막장 소재와 초치기 촬영의 드라마 시장을 꼬집은 ‘쪽대본’ 특집, 쌀시장 개방에 따른 우리 쌀 살리기 프로젝트 ‘벼농사’ 특집 등 무수히 많은 명작들이 있다.


대한민국의 예능프로그램은 무한도전 이전과 무한도전 이후로 나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무한도전 이전에도, 무한도전 이후에도 수 없이 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무한도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까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과연 이러한 장수의 비결이 오로지 기호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단순히 재미와 웃음과 감동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작년에 웹툰을 소재로 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tvN 드라마 ‘미생(未生)’의 경우에도 비슷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제목인 ‘미생’이라는 말은 아직 완전히 살지 못한 상태를 뜻하는 바둑 용어인데, 고졸 프로바둑기사 지망생인 주인공 장그래가 바둑의 꿈을 접고 지인의 도움으로 취업한 회사 내에서 처한 주인공의 위치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는 단어이기도 하다. “사회도 바둑과 다를 바 없다”는 극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바둑’은 단순히 주인공의 특이한 경력 정도로 끝나지 않고, 전체 드라마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주요 모티브가 된다. 또 다른 바둑판인 직장 원인터내셔널에서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로서 한집(미생)이 아닌 두 집(완생)을 짓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대체적으로 위기의 상황)을 바둑의 다양한 수(手)에 비유하여, 상황을 판단하는 동기가 되고, 그 상황을 해결해 나가는 결정의 열쇠가 된다. 이는 1987년에 방영되었던 인기 드라마 ‘TV 손자병법’에서 역시 ‘회사는 전쟁터’라는 가정으로 전쟁에서 사용되는 갖가지 ‘병법’들을 직장생활의 다양한 상황에 맞게 변형하여 처세술, 경쟁, 생존법과 같은 전투 전략으로 비유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한도전은 스스로를 ‘미생’이라고 한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결같이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두 집을 짓기 위해 노력하는 반집짜리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특정한 장르를 정하지 않고, 매주 새로운 도전을 한다. 시청자의 기호에 따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출연자들의 컨디션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프로그램이다. 때로는 무한상사의 평범한 직장인으로, 때로는 추격전의 무한 이기주의자로, 때로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동네 좀 모자란 형으로 변신한다. 굳이 기호학이라는 다소 딱딱한 말로 표현을 하자면 프로그램 안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결코 낯설지 않고 바로 나 혹은 내 주변에 꼭 있을 법한 사람으로 치환되는 매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영방송의 연출가로서 사회의 메시지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웃음과 감동과 의미를 모두 놓치지 않는 것이 무한도전의 성공 비결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이제는 다시 보기로 밖에 만날 수 없는 무한도전이여! 유재석의 무한도전인 "놀면 뭐하니?"가 있긴 하지만 가끔은 이 감성 그대로 지금의 이슈들을 코믹하게 풀어 주면 어떨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무한도전 #기호학 #레전드예능 #놀면뭐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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