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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엠 저리킴 Apr 26. 2022

개그맨의 꿈을 접은 결정적 이유

2001년 KBS 개그 콘테스트
최종 20인 결선 진출


10년 넘게 도전해온 내 꿈에 한 발짝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2001년 KBS 별관에서 열린 개그 콘테스트 최종  결선 무대에 진출하여 최종 20인의 개그맨 지망생들과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한 발짝만 더 나가면 이제 꿈에 그리던 개그맨으로 정식 데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이다.




중학교 시절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착실한 크리스찬이었다. 집이 워낙 가난하다 보니 차림새가 영 깔끔하지 못했지만 웃기는 걸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당시 연말이 되면 대부분의 교회에서 <문학의 밤>을 준비했는데, 보통 날짜가 겹치지 않으면 이웃 교회들끼리도 서로 방문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 교회의 <문학의 밤>은 꽤 주변에서도 유명한 편에 속했다. 나는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남들 웃기는 거밖에 없어서 항상 <문학의 밤>의 꽃인 꽁트를 담당했다. 인터넷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그저 티비를 보면서 모든 영감을 얻어야 하는 극한의 상황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너무 익숙했기에 힘든지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꽁트의 핵심은 아이디어와 대본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그때 어떻게 대본을 썼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아마도 손으로 써서 복사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볼 수밖에 없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각종 <문학의 밤>, <수련회> 등에서 아이디어와 대본을 도맡아 담당하면서 그렇게 개그맨에 대한 꿈을 조금씩 키워왔다. 


고등학생이 되자 본격적으로 개그맨을 꿈꾸기 시작했다. 남을 웃긴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투머치토커의 기질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과장스럽게 웃기는 것보다는 토크와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하던 내 개그 스타일은 나름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어떻게 개그맨이 되어야 하는지 아무런 정보도 없었지만 막연히 개그맨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본격적으로 개그맨 시험에 도전했다. 요즘으로 치면 <쇼미더머니> 예선전처럼 체육관이나 강당 같은 곳에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다가 한 조씩 들어가서 1차 예선을 보는 방식이다. 당시에는 KBS 뿐 아니라 방송 3사를 모두 찾아다니며 시험을 봤으나 단 한 번도 1차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도 마냥 즐겁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학교에 복학을 하고 계속해서도 개그맨의 꿈을 버리지 못했지만 결과는 늘 좋지 못했다. 그렇게 2000년이 되어 홍대 불문과 학생회장을 맡으면서 가을에 열리는 <불문인의 밤> 총괄 기획 단장을 맡게 되었다. 보통 <불문인의 밤> 연극에서는 프랑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을 올리는 전통이 있었는데, 나는 그런 전통을 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익숙한 우리의 이야기를 불어로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발상이었다. 불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내용만 보면 대충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본격적으로 <춘향전>의 대본을 쓰고 불어 번역에 들어갔는데 결과적으로 학생들이 하는 번역이다 보니 한계에 부딪혔다. 결국 공연 한 달을 남기고 급하게 코믹극 <엽기 춘향전>으로 전면 수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유도, 명분도 없는 <엽기 춘향전>의 대본을 쓰고, 배역을 전면 교체하고, 짧은 시간 동안 연습에 들어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춘향전>이 아니라, 사이사이에 코믹적인 요소를 엄청나게 배치하여 1시간 내내 웃을 수 있는 연극으로 탈바꿈했다. <불문인의 밤>에서 프랑스 문학이 아니라 전혀 연관도 없이 뜬금없는 <춘향전>이라는 코믹극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동문들의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았기에 일단 모른 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시도 자체로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어렵게 찾아주신 선배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물할 수 있었다.




이 <엽기 춘향전>에서 나는 변사또의 배역으로 엽기적인 춘향이한테 오히려 당하는 불쌍한 역할을 맡았었는데, 그때 썼던 대본 중에서 몇 가지 상황을 가지고 <변사또전>이라는 1인극으로 각색하여 2001년 KBS 개그 콘테스트에 다시 재도전을 했다. 이제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하고 시험에 임했는데, 1차를 가볍게 통과하고, 2차와 3차도 어쩐 일인지 무난하게 통과했다. 이제 최종 20인이 겨루는 마지막 결선 무대에서 최종 10인 안에 들면 꿈에 그리던 개그맨이 되는 것이었다.


당시 최종 결선에 오른 사람은 총 20명으로 그중 알만한 사람은 김기수(댄서 킴), 김인석(아하 그렇구나), 정명훈(명훈이 들어가), 추대엽(카피추), 김병만+이수근(당시 콤비로 개콘 출연 중이었지만 결국 그해에는 탈락하고 김병만 2002년에 합격, 이수근은 2003년에 특채로 합격), 이재훈(아따 거시기 허요), 김시덕(내 아를 낳아도), 김영삼(치과의사 개그맨) 등이 있었다. 최종 20인으로 선발된 인원들은 바로 무대에 오르는 게 아니라 약 1개월간 출퇴근하며 단체 춤 연습과 함께 개인 코너 연습을 병행하며 마지막 전의를 불태웠다. 


그렇게 1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결전의 시간. 무대에 오른 20명은 각자 자신의 개그를 선보였고 나도 최선을 다했지만 너무 큰 무대에 처음 올라서인지 긴장을 너무 많이 해 1개월 동안 준비한 대사를 몇 번이나 잊어버리면서 무대를 내려오면서 사실상 탈락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당시 친하게 지냈던 김기수, 김인석, 이재훈, 최희선 등이 합격을 해 축하와 위로를 나누며 헤어졌고 그 뒤로도 간간히 연락은 했지만 지금은 김인석을 제외하면 거의 연락이 끊긴 상황이다. 




나는 그날 이후 개그맨의 꿈을 완전히 접었다. 10년이 넘게 가져온 꿈을 과감히 접을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최종 무대에 올라서 보니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니었음을 완전하게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좀 웃기다는 사람들이 다 모여 경쟁을 하다 보니 나는 생각보다 평범한 사람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또 나는 무대 아래에서는 훨훨 날아다니지만 정작 무대 위에서는 너무 위축이 되는 사람인 것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학교 무대나 교회 무대에서 느끼는 부담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압박감을 결국 이겨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었고,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그걸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도전해보지 않았다면, 혹은 결선 무대에까지 못 오르고 헤맸다면 계속 후회와 미련이 남았을 텐데 정말 한 톨의 미련도 없이 꿈을 정리할 수 있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어설프게 합격을 해서 방송의 세계에 발을 들였더라면 그 치열한 방송계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었을는지 모르는 일이다. 한 때 잘 나갔던 개그맨들도 지금 설자리를 잃고 헤매고 있는 실정인데, 나 같은 어중간한 실력에 인심만 좋고, 독하지 못한 개그맨은 벌써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없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 이후로는 개그맨 시험 이력으로 몇 군데 아르바이트와 직장에 취업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직장 내에서 적성을 잘 살려 오랜 시간 동안 분위기 메이커로 열심히 활약하고 있다. 다시 생각해봐도 지금의 내 삶이 완성된 데에는 그때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웃기는 사람보다 웃음과 행복을 주는 사람의 역할이 더 잘 맞는 듯하다. 앞으로도 내 장점을 살려서 주변 사람들에게 해피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전도사의 역할을 충실히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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