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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 작가 진절 May 22. 2022

회장과 총무 (영춘과 진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다 문득 떠오른 어린 시절의 단상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미란과 은희'의 에피소드가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우정과 의리를 쌓아오던 미란(엄정화)과 은희(이정은)가 50대가 된 지금 각자 어떤 모습으로 상대를 기억하고 평가하고 있는지에 대한 적나라한 감정이 펼쳐졌는데, 문득 나의 베프 영춘에 대한 기억이 소환되어 3인칭 시점으로 한 번 기억을 떠올려볼까 한다. 영춘은 나의 브런치 북 <지옥에서 사옥까지> 에서도 영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정도로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 친구이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둘은 친구이지만 사실 '공주'와 '무수리'라는 역할로 아슬아슬한 친구 관계를 이어가듯, 나의 기억 속 영춘과 나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아 많은 공감을 자아내는 에피소드이다. (물론 영춘, 진절 모두 별명이다)




진절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겨울 방학 즈음, 교회에서는 한창 학생회장 선거가 치러지고 있었다. 진절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그 교회에서 벌써 5년째 학생회의 실질적 리더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선거는 해볼 것도 없이 당연히 회장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감투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사상 가장 심심한 선거가 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선거가 있기 6개월 전쯤 영춘이라는 친구가 교회에 등장했다. 영춘은 진절의 누나 친구 동생으로 예전 국민학교 시절에 교회에 몇 번 나왔던 적이 있었기에 안면은 있었지만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였지만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 좀처럼 교류가 없었던 사이였다.


영춘이 처음 교회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만 해도 그냥 누나의 성화에 못 이겨 조금 다니다 말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다. 교회 안에 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진절과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고, 영춘은 주로 혼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생각보다 꾸준히 나오던 영춘은 조금씩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이내 진절은 물론 친구들까지도 잘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다. 짧은 시간 안에 아주 오랜 친구였던 것처럼 스며들기 시작했고, 이내 주류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진절은 영춘과 호흡이 척척 잘 맞는 친구였기 때문에 오히려 기존에 있던 친구들보다 더 친해질 정도로 거부감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 학생회 회장 선거일이 다가왔고, 진절과 함께 영춘이 나란히 회장 후보에 올랐지만 아무도 진절의 회장 당선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조그만 교회의 학생회장 선거에 무슨 세부 규칙 같은 게 있었겠는가. 고작 6개월 정도 다닌 이력이 전부였지만 영춘이 회장 후보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는 규정도, 사람도 없었다. 결과가 너무 뻔했기에 그런 부분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진절 역시도 단독 후보로 오르는 것보다는 경쟁자가 있으면 훨씬 더 모양새가 좋을 거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영춘은 무사히 회장 후보에 오르게 되었다.


개표를 시작하자 흐름이 묘하게 흘러갔다. 당연한 우세를 예상했던 진절은 박빙도 아닌 큰 점수차로 영춘에게 회장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아니 실제로 크게 졌으니 양보라는 말이 좀 어울리지 않지만, 어쨌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영춘은 학생회 '회장'이 되었고, 진절은 관례에 따라 '총무'가 되었다. 영춘은 회장이 되어 진절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어차피 나는 교회 운영에 대해 잘 모르니 네가 알아서 잘해줘. 나는 같이 열심히 도울게."라고 했다. 회장이든 총무든 직급에 관계없이 진절은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그저 열심히 했고, 영춘은 잘 모른다는 핑계로 늘 한 발 뒤에 빠져있었다. 일이 잘 진행될 때는 회장이 빛이 났고,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총무가 욕을 먹었다. 진절은 뭔가 억울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학생회를 이끌었고, 마지막 문학의 밤 행사까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하며 임기를 마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는 교회에 잘 나가지 않게 되었고, 영춘과 진절 그리고 친구들은 이제 주로 밖에서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술도 마시고, 당구도 치고, 알바도 같이 하는 그런 평범한 동네 친구처럼 1년 365일 중에 360일을 붙어 다녔다. 특히 영춘과 진절 두 사람은 항상 함께였고, 모든 모임은 두 사람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이상하게도 영춘과 진절의 관계는 늘 회장과 총무 같은 역할 분담이 되었다. 계획하고 준비하고 계산하는 건 항상 진절의 몫이었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영춘의 몫이었다. 서로 딱히 역할 분담을 한 것도 아니지만 그게 익숙해서인지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가 형성되었다.


시간이 흘러 영춘은 이른 나이에 홈쇼핑 사업을 시작했고, 몇 번의 실패를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신불자도 되고, 많은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당연히 진절도 적은 돈이지만 돈을 빌려주었고 오랜 시간 받지 못했다. 그렇게 몇 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 영춘의 사업이 한 방이 터져 모든 빚을 청산하고 사업가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의 고생을 아는 친구들은 영춘의 성공을 축하했고, 한동안 뜸했던 모임을 다시 시작했다. 모임의 주축이었던 영춘이 어려울 때 자주 갖지 못했던 모임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미친 듯이 모여서 술과 여흥을 즐겼다.


그렇게 좋았던 것도 잠시, 영춘의 성향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시절 금전적으로 투자했던 친구들에게 제대로 된 배당도 없이 원금과 이자 수준의 돈을 돌려주고는 사업에서 빠지도록 했다. 옆에서 조언하는 친구들을 조금씩 멀리 하기 시작했고, 술자리에서 굉장히 허세에 찬 말들을 내뱉었다. 어떤 대단한 사람들을 만나는지, 어떤 비즈니스를 하며 얼마나 크게 대박이 났는지 등을 이야기하며 친구들을 주눅 들게 만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알지 못했다. 진절 역시 그런 영춘이 매우 우려되었으나 그냥 적당히 호응해주며 그의 옆을 지켰다. 그러는 사이 친구들은 하나둘씩 멀어져 갔다. 하지만 영춘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 그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수두룩하기 때문에 친구들과의 관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춘의 생일에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과 신나게 술판을 벌이고 2차로 조용한 바로 자리를 옮긴 영춘은 진절에게 깜짝 제안을 했다. 자신이 3억 정도 투자를 할 테니 같이 사업을 한 번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진절은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빠르게 주변 상황을 검토한 후 함께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직원 구성, 매출 거래처 확보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영춘에게 최종 사업 계획안을 브리핑했다. 하지만 영춘은 잠시 망설이더니 투자가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고, 진절은 그야말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돌아갈 수 있는 다리를 모두 끊고 배수진을 쳐놓은 상황이라 이제 와서 뒤로 무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진절은 그냥 쿨하게 알았다고 하며 그 자리를 나왔다. 자존심 때문인지 자신감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렇게 영춘의 투자 계획은 순식간에 백지화되었고, 진절은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혼자 남겨진 쪽배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진절은 영춘을 원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업이라는 게 누구의 도움을 받으면 그만큼 의무와 책임이 많아지기 때문에 이렇게 된 바에야 스스로 개척해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을 뿐이다. 그렇게 몇 년간 진절은 엄청난 고난의 시간을 견뎌나갔고, 어쩌다 영춘을 만나서 술잔을 기울일 때면 영춘은 늘 미안한 마음으로 진절을 격려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러 진절은 드디어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고, 회사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영춘은 누구보다 진심으로 기뻐하며 진절의 사업이 잘 되기를 기원해 주었다. 영춘 본인이 가진 마음의 빚이 조금씩 차감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영춘의 진절의 승승장구를 진심으로 응원했고, 진절은 한 번 잡은 기회를 바탕으로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사건은 그즈음에 터지고 말았다. 진절의 사업이 날로 번창하자 진절을 응원하던 영춘의 마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진절의 사업이 단순히 자리를 잡는 수준을 넘어서 파죽지세로 올라가자 조금씩 응원보다는 질투에 가까운 마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절이 홍대에 회사 사옥을 매입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영춘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자신이 10년 넘게 사업을 하면서 하지 못한 일을 진절이 고작 4년 만에 그것을 이루어냈다는 이야기가 좋게 들릴 리가 없었다. 갑자기 영춘은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진절의 자리에서 가장 먼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자리가 파할 때까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진절은 영춘의 갑작스런 전화를 받았다. 거하게 술을 살 테니 강남으로 넘어오라는 것이었다. 진절은 새로운 프로젝트로 바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영춘의 요청을 마다할 수가 없어 빠르게 업무를 정리하고 찍어준 주소로 급히 달려갔다. 도착해서 방에 들어가니 영춘과 익동, 개태가 함께 있었다. 진절과 개태는 오랫동안 앙숙과 같은 관계였다. 몇 년 전 어떤 사건을 계기로 절교를 한 상태였는데, 진절은 뜻하지 않게 어색한 만남을 맞이하게 되었다. 영춘은 이미 낮부터 익동, 개태와 함께 낮술을 하여 만취가 되어있는 상태였고, 술김에 진절과 개태를 화해시키겠다는 마음으로 호출한 것이다. 불편한 마음으로 일단 자리에 앉은 진절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영춘은 취한 상태로 진절과 개태에게 계속해서 화해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진절은 알아서 하겠다고 답을 했지만 영춘은 막무가내였다. 마치 일진이 꼬붕 두 명에게 싸워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모욕감을 받았고, 진절은 말도 없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즐거운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모자란 인생인데 이런 수모를 참아가면서 앞으로 영춘을 계속해서 만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진절은 집으로 가면서 영춘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고 전화, 카톡, 페북, 인스타 등 모든 연락 수단을 차단하며 영춘과의 길고 긴 인연을 마감했다.




아내가 물었다. 그래도 혹시 기회가 된다면 영춘이를 만날 의향이 있는지. 나는 단호히 말했다. 내가 죽거나 영춘이가 죽어서 서로 장례식장에 가는 정도 아니면 다시는 볼 생각이 없다고. 근 30여 년 간 나는 '회장'과 '총무'라는 타이틀에 맞게 영춘의 그림자로 살아왔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은희'가 30년 동안 '미란'의 무수리로 살아왔던 것처럼. 내가 현재 아무리 잘 살고 있고,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해도 나는 그 관계를 역전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지만 영춘은 내 삶에서 영원히 '회장'이고 싶었고, 내가 '총무'이길 바랬던가 보다. 나한테 사업을 제안하고, 투자를 철회하고, 연민의 마음을 가질 때까지만 해도 그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내가 점점 커지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우위가 역전될 위기에 놓이자 그는 본색을 드러냈고 더 적극적으로 '회장' 노릇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심지어 그 기회는 자신이 제안한 것이고, 본인이 투자를 했더라면 엄청난 이익을 가졌을 것이라는 아쉬움까지 더해져 극단적인 상황극까지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상대가 나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으면 먼저 물거나 혹은 피하거나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누군가 나를 심하게 깨물려고 하는데 그대로 멍청하게 받아주는 스타일도 아니다. 더구나 내가 도망갈  있는 곳이 천지에 널렸는데 굳이 그런 미친개와 허허벌판에서 물고 뜯는 개싸움을 하고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적극적으로 물어뜯을 수도 있었지만 시간과 에너지가 아까워 그냥 도망가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완벽하게 지워지기로 했다. 내가 없어진다면 그는 조금  행복할 것이다. 영원한 '총무'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계속해서 '회장' 위치를 유지할  있고, 그의 주변엔 수많은 '총무' 후보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뭐라도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주변을 기웃거리는 하이에나들이 많으니 영춘은 전혀 아쉬울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있는 것이 그가 가오(?) 잡는데 방해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서로 win-win 상황이니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Universe에서는 또 나를 중심으로 수많은 지인들과 얽히고설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의 세계에 휘말려 내가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 그래도 내가 월급을 받으며 평온한 삶을 살고 있을 때 나에게 엄청난 자극을 주어 사업을 시작하게 만든 것과 결정적인 타이밍에 투자를 철회하여 나의 전투 의지를 불태워 준 것은 영춘이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 영춘과 진절의 이야기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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