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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 작가 진절 Aug 21. 2023

목소리를 잃고, 얻은 것들

현대판 인어공주의 재림


성대 플립 제거 수술을 한지 벌써 17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지난주 외래 진료 시 의사 선생님은 어제부로 완전 묵언의 시간을 종료해도 된다고 했다. 오늘부터는 아주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가능하다고 했으나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조금 더 자제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까지 말을 안 하고, 살 수 있는 건 마지막이 될 거 같으니까.


처음 수술이 결정되던 날, 의사는 2주간 말을 안 하고 살 수 있느냐에 대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물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말을 안 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고민을 하고는 이내 가능하다고 말을 던졌다. 우선 일에 대한 부분은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완성시키는 것까지가 나의 역할이었고, 실무적인 부분은 회사의 두 본부장님께서 알아서 진행하실 테니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사람들 만나서 네트워킹을 해야 하는 부분에서도 역시 내 목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기에 이해해 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오히려 하루 종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가족들과의 의사소통이 가장 걱정이었으나 바디 랭귀지와 아이패드 메모장, 카카오톡으로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되었다.


처음엔 나도 모르게 무조건 반사적으로 짧은 말을 내뱉었기에 입에 의료용 테이프도 붙이고 있었으나 이제는 익숙해져서 정말 급한 일 아니고서는 묵언의 생활이 굉장히 익숙해졌다. 역시 사람은 강력한 적응의 동물이다. 처음엔 조금만 부딪혀도 바로 외마디 비명을 질렀는데, 지금은 어지간한 아픔에도 그저 입모양으로만 아픔을 표현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앞으로 내 남은 날들의 수많은 대화를 위해서 8월 말까지 약 열흘의 시간 동안 이러한 패턴을 유지해보려고 한다.




이번 성대 결절 수술과 묵언 수행으로 인해 잃은 건 목소리 하나뿐이지만 얻은 것은 너무나 많다. 목소리는 영원히 잃은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이므로 결국 잃은 건 하나도 없고 오직 얻은 것뿐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오랜 침묵의 시간 속에서 생각할 시간과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통해 얻고 깨달은 것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아이러니하게도 돈이다. 백만원이 넘는 수술비를 지불했지만 그 중 절반 이상은 보험사로부터 돌려받을 것이고, 근 한 달의 시간 동안 집에 머무르면서 세이브되는 돈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크다. 밖에 나가서 사람들 만나면 커피도 마셔야지, 골프도 쳐야지, 2차 3차로 이어지는 술값에 대리비, 택시비 등 교통비까지 포함하면 한 달간의 칩거 생활동안 절약된 비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그렇게 모인 비용으로 가족들과 배달음식 하나 더 시켜 먹으면 보람은 두 배로 커진다. (물론 모여서 말을 못 하는 단점이 있지만...)


두 번째는 시간이다. 평소에 사람들을 만나느라 항상 시간이 부족했고, 하고 싶은 건 많아도 정작 실행하는 것이 적었던 결정적 이유는 시간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대부분인 지금은 더 이상 핑곗거리도 없다. 그저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껏 해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가장 먼저 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프리미어 공부를 시작했고 몇 개의 쇼츠를 제작해서 업로드했다. 막연하게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하나씩 미션을 클리어하면서 새로운 재미를 느껴가고 있다.


◼︎유튜브 쇼츠 01

◼︎ 유튜브 쇼츠 02

영상 편집 외에도 한동안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못했었는데, 최근에는 그래도 일주일에 2-3편 정도는 업로드하려고 많은 글감을 쌓고 있고, 하나씩 꺼내서 쓰고 있다. 예전만큼 활발한 활동을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글을 올리면서 막혔던 혈을 뚫고 있는 중이다.  


목소리를 잃고 얻은 마지막 선물은 바로 건강(feat. 턱선)이다. 성대 수술 자체가 아파서 한 것이 아니기도 하고 전신 마취를 하고 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몸에 통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말을 못 하는 괴로움 외에는 어떠한 물리적 아픔도 없다. 다만 이렇게 외부 활동 없이 집에만 있다 보면 체중이 늘어나고 건강이 안 좋아질 거라 생각하기 쉬울 텐데, 나는 평소에도 휴일에 집에서 누워있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먹고 늘어져 있는 행동을 잘하지 못한다. 더구나 지금 하고 싶었던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것들을 하나씩 처리하다 보면 하루가 너무 빠르게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건강을 얻게 된 결정적 원인은 바로 술이 아닌가 싶다. 거의 20일 가까운 시간 동안 술을 입에 대지 못하고 있다 보니까 과격한 운동이 아니라 약간의 홈트 정도만으로도 살이 빠지고 건강이 올라오는 중이다. 확실히 이번을 계기로 느낀 것이 나의 건강을 망치고 있는 가장 나쁜 습관이 음주라는 사실이다. 마침 와이프가 간단하긴 하지만 역시 음주를 할 수 없는 수술을 한 상태라 둘 다 술을 입에 대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동반으로 몸에 라인이 형성되고 있다.




돈, 시간, 건강. 이 세 가지 모두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들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번 침묵의 시간을 통해 그 어렵다는 이 세 가지를 조금이나마 얻게 되었으니 앞으로 묵언 수행이 끝난 이후에도 이러한 삶의 방식을 조금은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예 없앨 수는 없겠지만 가급적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사람 만나는 것도 줄이고, 만나더라도 불필요한 대화를 줄이고, 술 대신 차를 마시고, 그렇게 얻어진 돈과 시간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에 투자하는 유의미한 일들을 해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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