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Fall in love with CASINO
계절은 1월을 지나 어느덧 2월 중순이 되었을 무렵, 영훈은 진혁에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실력이 거기서 거기인 데다 판돈도 너무 작다 보니 영훈에게는 솔직히 성이 차지 않았고, 진혁도 한 달 동안 차곡차곡 많은 돈을 벌기는 했지만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에는 친구들의 실력이 너무 형편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민섭 역시 첫날 도리짓고 땡에서 받은 굴욕적 패배를 딛고 포커에서는 어느 정도 복구를 한 상태였고 3월부터 또 새로 시작할 알바까지는 약 보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너 그동안 돈 얼마나 땄냐?"
"나야 별로 못 땄지. 첫날 빼고는 한 번도 시원하게 따본 적이 없어서 그냥 그럭저럭 이야."
"야.. 진혁이 너 진짜 무서운 놈이구나. 내가 모를 줄 알고. 입만 열면 구라를 치냐.. 니가 매일 1등 뒤에 숨어서 따박따박 2-3등 유지하면서 소리 소문 없이 돈을 모으고 있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귀신을 속여라 이 새끼야."
"에이.. 그래봐야 개평 주고 술값 보태고 하면 뭐 남는 것도 없어."
"그래 너 잘 났다. 그거 모아서 집 살래? 민섭이 너는 어때?"
"어.. 나는 첫날 처참하게 말린 거 어느 정도 복구했고, 그래봐야 한 10만원이나 땄으려나?"
"그래도 결국 따긴 땄네.. 너도 독사 같다 진짜. 티도 안 나게 야금야금 ㅋㅋㅋ"
"첫날 아니었으면 진짜 지금 많이 모았을 텐데.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살 떨려.. 도리짓고 땡은 다신 안 해!"
영훈은 진혁과 민섭의 재정상태를 체크한 뒤 잠시 고민에 빠지다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
"우리 방학도 얼마 안 남았는데, 해외 카지노 한 번 안 갈래? 친구들하고 수준 안 맞는 거 맨날 하고 있으려니까 도저히 성이 안 차서 말이야. ㅎㅎㅎ"
"야.. 생각만 해도 너무 설렌다. 근데 거기 가려면 돈이 얼만데 가냐. 나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나도 마찬가지야. 엄마 혼자 계신 데다 돈이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거길 어떻게 가.. 안돼 안돼"
"필리핀 클락 알지? 거기에 우리 삼촌 계셔서 비행기만 끊어서 가면 삼촌이 먹고, 자는 거는 다 해결해 주실 거니까 그렇게 부담은 안될 거야. 비행기도 싼 거 잘 고르면 10만원이면 갈 텐데. 카지노 가서 돈 따기라도 하면 그냥 공짜로 가는 거잖아. 여기서 애들하고 카드 치면서 잃는 거랑 다를 게 뭐 있어. 가자"
진혁과 민섭은 영훈에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친구들하고도 레이스를 하다 보면 10만원 잃는 건 일도 아니었고, 원래 가지고 있던 원금에 그동안 딴 돈을 감안하면 적어도 비행기 값 빼고도 200달러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해외를 나간다고 했으면 그 돈 다 털어도 한참 모자란 돈인데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면 더 늦기 전에 도전해 봄직한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렇게 신세 져도 될까? 삼촌한테?"
"야 삼촌이면 그냥 가족인데 뭘.. 우리 삼촌 거기서 아주 잘 나가는 호텔 운영하고 계셔. 걱정 안 해도 돼. 만약 가서 돈 다 잃으면 호텔에서 하루 이틀 빡시게 알바해서 또 돈 받아서 카지노 가면 되니까 일단 가자! 고고?"
진혁과 민섭은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영훈이 제안하고 진혁과 민섭이 수락하면서 급 카지노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갑자기 여행을 가게 될 줄 몰랐기에 여권조차도 없는 둘은 부랴부랴 급행으로 여권을 만들고 티켓 예약을 한 뒤 개강을 일주일 남기고 클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필리핀 메인 섬인 루손 섬에 위치한 클락은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보통 마닐라 공항으로 들어가 차로 2시간 여 이동해서 가곤 했는데, 어느샌가 클락이 인기를 끌면서 직항이 늘어나 좀 더 편하게 클락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클락 국제공항은 한국인을 비롯한 한중일 동북아시아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클락은 2차 대전 이후 미군 부대가 주둔하며 인근에 유항가와 카지노가 번창하기 시작했는데, 미군은 철수했지만 여전히 유흥 시설들은 남아있어 통상적으로 클락을 앙헬레스(Angeles : 천사들의 도시)라고 섞어서 부르기도 한다. (물론 실제로는 클락과 앙헬레스는 엄격히 구분되는 지역이다) 영훈은 진혁과 민섭에게 이러한 역사적 지식을 전달해 주었지만 진혁과 민섭은 첫 해외여행이었기에 그런 말들이 잘 뒤에 들어오지 않았다.
"Hoon! it’s been a while."
"Juan, long time no see. How have you been?"
"I'm doing well, how about you?"
"I have lived well, too. These guys here are my friends"
영훈은 이미 어릴 적부터 삼촌이 살고 있는 클락을 자주 드나들었고, 동네 사람들과도 매우 친숙한 사이로 스스럼없이 영어로 안부를 물었다. 진혁과 민섭은 어리둥절해하며 영훈을 맞이하는 현지인들에게 손을 흔들며 고개를 숙이는 어리숙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와 씨.. 너 영어 끝장나게 잘한다."
"나도 잘 몰라. 그냥 안부 인사나 하는 정도지. 니네도 문법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고등학교 때 배웠던 단어만 잘 골라서 나열해도 다 알아들어. 여기 사람들도 따갈로그가 모국어라 우리랑 비슷하다고 보면 되고, 특히 여기 한국인 사장들이 많아서 간단한 한국말들도 곧잘 하니까 너무 당황하지 마. ㅎㅎㅎ"
"와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입으로 하려니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네. 하다 보면 적응되겠지. 진짜 신기하다."
"그러게.. 머릿속에서는 단어들이 막 떠다니는데 뱉어지지가 않아 ㅋㅋㅋ 훈이 새로운 모습이네. 신기하다."
새벽에 도착한 친구들은 앙헬레스 워킹 스트리트 인근에 위치한 삼촌의 호텔에서 잠을 청하고는 아침 일찍 일어나 워킹 스트리트 근처에 위치한 발리바고 카지노에 출동을 했다. 오전 시간이라 아직 객장은 고요했고 영훈 일행을 비롯하여 몇몇 부지런한 한국인들이 가끔씩 객장을 서성이며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야, 촌스럽게 어버버 대지 말고 몰라도 당당하게 막 해야 돼. 초보 티 내지 말고. 알았지?"
"어.. 어.. 나름 공부 많이 하고 왔어. 이론적으로는 빠삭하다고 ㅋㅋ"
"영어는 몰라도 괜찮겠지? 먼저 블랙잭부터 해볼까?"
"그래 간단하게 블랙잭부터 가보자. 단어 몇 개는 꼭 외우고 들어가야 해. 잘 기억해."
* No more bet? : 베팅 마감
* Surrender? : 패가 별로일 때 포기하면 절반만 돌려받음
* Insurance? : 딜러 패 한 장이 A일 때 블랙잭에 대한 보험 가입 10달러 베팅하면 20달러 보상
* Hit & Stay : 한 장 더 받거나, 더 이상 받지 않음
* Double : 베팅 금액을 2배로 올리는 대신 only 1장만 더 받을 수 있음 (통상 플레이어 패 합이 9, 10, 11이고 딜러 패 한 장이 4~6과 같이 bust 확률이 높을 때 주로 사용)
* Split : 플레이어가 같은 숫자가 나왔을 때 두 개를 찢어서 각각 1장씩 더 받을 수 있음
* Bust : 숫자 카드의 합이 21을 넘어감. 'too many'라고도 부름
진혁과 민섭은 이미 수차례 예습을 해왔지만 막상 블랙잭 테이블에 처음 앉으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카지노에서 미니멈 bet 이 가장 낮은 10$ 테이블이긴 했지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두려움이나 걱정의 두근거림이 아닌 설레임과 짜릿함으로 미세하게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첫 블랙잭 판이 딜러의 손을 통해 돌아갔고, 진혁과 민섭은 딜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게임에 임했다.
"아니, 근데 왜 다이아 6이 2개나 나오는 거야? 이거 사기 아냐?"
"야야.. 쪽팔리니까 입 좀 다물고 있어. 원래 블랙잭이나 바카라는 5~6개의 패를 섞어서 랜덤으로 내보내는 거야.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다이아 6이 2개가 아니라 5개까지 나올 수 있는 거라고"
"아... 쏘리 쏘리. 그런 건 인터넷에 안 나오더라고. ㅋㅋㅋ. 영어로 얘기했으면 국제적 망신당할 뻔했네."
"영어는 할 줄 알고? ㅋㅋㅋ 패를 1개로 하면 남은 카드의 개수에 따라 플레이어들이 예측이 쉬워지니까 일명 카운팅이라는 것을 못하게 하려고 대여섯 개 패를 쓰는 거야. 참고해"
"오케이! 감사합니다. 선생님. 근데 나는 A 하고 8이라서 합 9니까 한 장 더 받아야겠지?
"아 진짜 너 공부하고 온 거 맞아? A는 1도 되고 11도 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너는 9가 아니라 19라고."
"아, 맞다. 맞다. 내 정신 좀 봐. 고새 그걸 까먹네 ㅋㅋㅋ 미안. i am stay. 영훈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는 6+6=12라서 원래는 받아야 하는 게 맞는데 딜러가 5니까 무조건 공격적으로 스플릿으로 가야지. Split. please"
영훈은 자신의 6 두장을 스플릿 하기 위해 추가로 10달러를 베팅했다. 영훈의 능숙한 베팅과 테이블 매너를 본 두 촌뜨기들은 더욱 위축이 되며 영훈의 플레이를 주목하고 있었다. 사실 영훈도 카지노에 자주 와본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 앞에서 모양 빠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두 장의 6♦︎에 4♣︎와 3♠︎이 각각 붙어 10과 9가 되었다. 영훈은 딜러의 패가 5임을 감안했을 때 무조건 공격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블랙잭에서는 10, J, Q, K가 모두 10으로 카운팅 되기 때문에 다음 장이 10이 될 확률은 30.7%이고 두 장 연속 10일 확률은 무려 10%에 가까워진다. 더구나 딜러의 5인 경우에는 10-10 뿐 아니라 7-10, 8-9, 8-10, 9-10, 10-10까지 17 이상으로 딜러가 bust가 될 수 있는 확률을 전부 계산해 보면 25%가 넘고, 심지어 딜러가 6일 경우에는 확률이 32%까지 bust 확률이 올라간다. 물론 이것은 2장으로 bust가 될 확률이고 3~5장으로 bust 될 확률까지 감안하면 딜러 4~6일 때는 최대한 추가 베팅을 활용해야 한다.
물론 영훈의 성격상 이런 세세한 확률까지 다 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친구들보다는 여러 번 왔던 경험을 기억해 내며 그저 감으로 베팅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영훈은 진혁이라면 이런 숫자들을 다 머릿속에 익히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영훈이 스플릿 한 패는 각각 9와 10이 되면 최고의 상황이 마련되었다. 딜러의 패가 5이기 때문에 당연히 영훈은 다시 한번 더블 다운을 시도했다. 더블 다운은 본 베팅과 똑같은 금액을 한 번 더 베팅하는 대신 추가로 딱 1장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카드를 옆으로 눕혀 놓는다.
영훈의 첫 번째 핸드에는 K♠︎가 떨어지며 20이 되었고, 두 번째 핸드는 8♦︎이 나오면서 17로 마감을 했다. 두 번째 핸드가 다소 아쉬웠지만 어차피 딜러의 카드가 5♠︎이기 때문에 bust를 기대하면 되는 상황이라 영훈의 카드가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야, 나는 어떻게 해야 돼?"
"뭘 고민해 너는 지금 11이잖아. 그럼 뭐가 나와도 안 죽으니까 무조건 더블이지."
"아, 그런가? 그럼 10달러 추가로 내면서 더블이라고 말하면 되는 거야?"
"방금 내가 옆에서 하는 거 못 봤어? ㅋㅋㅋ 간지 나게 던져봐"
"오케이. I'm double"
"ㅋㅋㅋㅋ 아임 더블이래. 니가 더블이야?"
민섭은 영훈의 놀림에 순간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다 보니 그냥 더블이라 하면 너무 없어 보일 것 같아 뭐라도 붙여야겠다는 생각에 그만 말이 헛나오고 말았다 그것을 또 콕 찍어 놀리는 영훈이 얄미웠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아.. 왜 4♠︎가 나오냐. 망했네..."
"야야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딜러가 죽는 게 목적이었으니 니가 4♠︎ 나온 게 오히려 다행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오히려 다행이라니?"
"당연하지. 딜러는 높은 카드가 나와야 하는데 앞에서 그림(10, J, Q, K)을 다 빼버리면 뒤에 그림이 나올 확률이 낮아지잖아. 그러니까 니가 낮은 카드 나온 게 더 좋은 거지.. 이해가 됨?"
"아.. 그러네. 어차피 딜러와의 싸움이니까 딜러만 죽일 수 있다면 내 카드는 크게 상관이 없다. 이거지?
"Sure. 자 다 함께 외쳐! 딜러 Picture!! Picture!!"
딜러의 첫 카드는 9♠︎였지만, 다음 카드가 그림(J♥︎)이 나오면서 합계 24로 bust가 되었다. 그렇게 영훈의 말대로 모두가 승리를 하면서 진혁과 민섭은 생애 첫 카지노에서 깔끔하게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비록 10달러에 불과했지만 이 날의 승리는 두 촌뜨기의 마음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한판이 되었다.
to be continued... (8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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