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식으로 정답을 찾는 교육의 한계
미리 밝히지만 나는 학자도 아니고, 교육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한때 회사의 대표자로서 경험하고 느꼈던 바를 그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 역시도 학력고사에서 수능시험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운 좋게 수능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홍대 불문과에 가까스로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이다. 만약 학력고사가 유지되었다면 인서울은커녕 제대로 된 대학을 가지 못했을 것이다.
학력고사와 수능시험은 시험의 성격 자체가 완전 다르다. 학력고사는 기존 학교 시험의 연장선에서 단순 암기와 반복 학습만으로 시험 성적을 올릴 수 있지만, 수능시험은 포괄적 사고와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를 풀 수가 있기에 단순히 암기와 엉덩이 끈기만으로는 해결되지는 않는다. 굳이 둘을 비교하자면 수능시험이 조금 더 합리적인 방식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역시도 5지선다의 객관식 시험이기에 분명한 한계는 존재한다.
프랑스나 독일 같은 유럽의 선진국들은 어릴 적부터 스스로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하며 토론하는 교육을 많이 한다고 한다. 5개의 보기 중 하나를 선택하는 형태가 아니라 철학적, 인문학적, 종교적, 과학적 주제의 질문에 자신의 생각을 주관식으로 서술하는 형태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나는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했는데, 2학년부터는 '불어'보다는 '불문학' 혹은 '프랑스의 사상과 철학'에 대해 주로 배웠다. 한국의 공교육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매우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뜬구름 잡는 수업에 처음엔 도무지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러한 교육의 형태가 이해가 되고, 오히려 한국의 편협한 교육에 비해 훨씬 효과적으로 현생에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의 뜬구름 같았던 교육들이 현재의 나에게 아주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1+1=2'처럼 명확한 정답이 있는 현상은 거의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1+1=2'라고 철석같이 믿도 있던 사실도 상황에 따라서는 사실이 아닌 경우도 빈번히 발생하곤 한다.
그렇게 정답만을 강요받는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좀처럼 그 패턴을 벗어나기 힘들다. 일전에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에 왔을 때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의 기회를 주었으나 아무도 질문하지 못했던 일화가 대표적이다. 물론 미국 대통령이라는 긴장감과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부담감 등의 특수 상황은 이해하지만 단 한 명도 질문을 하지 못했던 그 순간에 많은 한국인들은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내가 그 상황에 있었더라도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질문을 망설였을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십수 년 동안 정답을 잘 찾는 사람으로 양성되었기에 답을 찾아내는 데는 익숙하지만 질문의 영역은 완전 다른 세계이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이후 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질문을 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communication)이라는 것은 결국 서로 질문과 답변을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과 같은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현실에서 비슷한 경험들을 자주 마주칠 것이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동료들과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가끔은 상대방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을 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져야 상대방의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 물론 크게 관심 없는 상대에게는 그냥 아무 말 대잔치로 질문을 해도 무방하겠지만...)
하나 예시로 들자면, 가끔 회사 후배 직원들과 면담을 하는 경우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김대리 요즘 힘든 거 있어?"
"..."
"힘든 거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해봐."
이런 질문에 정말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진심을 이야기하는 후배직원은 없을 것이다.
"아니에요. 힘든 거 없습니다. 너무 잘해주셔 가지고.."
이런 뻔한 답변이 돌아올 뿐이다. 그야말로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본인은 후배에게 뭐라도 조언이 될만한 이야기를 주고 싶어 한 질문이겠지만 후배입장에서는 괜히 속을 내보였다가 낭패를 볼까 싶어 조심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럼 어떻게 질문하는 게 좋을까? 아니 좋은 질문이란 어떤 것일까?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를 것이고,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질문을 하기 위해선 크게 3가지 정도의 방법이 있다.
첫째, 스무고개 형태로 질문을 이어가되 단답형에서 점점 서술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깊은 대화를 유도하는 방법이다. 처음부터 너무 어렵고 복잡한 질문을 하게 되면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캐주얼한 질문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뎁스를 올려가면서 질문을 하다 보면 상대방은 어느새 자신의 생각이나 어려운 점을 조금씩 드러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좋은 질문과 답변이 자연스레 이어질 수 있다.
둘째, 질문에 앞서 친절한 사전 설명이 필요하다. 밑도 끝도 없이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질문의 의도를 말과 목소리, 제스처 등 온몸으로 표출을 해야 한다. 그런 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상대방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더 조심스럽고 애매모호한 답변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내 경우에는 상대방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상대방의 상황과 비슷했던 내 경험을 에피소드로 살짝 양념을 친 후에(가끔은 MSG를 치기도 한다) 그에 대한 상대방의 생각을 넌지시 물어본다.
직원들과의 대화에서 이런 방식으로 접근해서 실패한 경험이 거의 없다. 그냥 '요즘 어때?' 수준의 질문을 던졌을 때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좋은 질문이란 상대가 부담 없이 진솔하게 답을 줄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상대방의 진심 어린 답을 듣기 위해선 충분한 예열 과정과 철저한 빌드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상대의 기호를 파악하여 수시로 경로를 바꿀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원하는 답이 있다고 하여 그것을 무조건 몰아붙일 게 아니라 다소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답을 기다려야 한다. 내가 설정한 경로에 따라 상대방이 반드시 따라오지 않는다 해도 유연하게 방향을 꺾어서 다른 주제로 넘어가며 다음 기회를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서로 관심 있는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늦더라도 정확한 목적지에 도달해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좋은 질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만나서 말로 설명하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모호한 주제에 대해 글로 설명하려니 분명한 한계가 느껴진다. 하지만 분명한 건 대인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데 있어서 '좋은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백번을 강조해도 부족하다. 상대방의 기분과 관계없이 나의 이야기만 주구장창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바로 '꼰대'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임을 명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