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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 작가 진절 Mar 02. 2021

프로 오지라퍼

남의 인생에 전지적 참견 시점

오지라퍼의 삶은 정말 피곤하다. 내 인생 앞가림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단하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도 너무나 궁금한 걸 어찌하랴. 더구나 아마추어도 아닌, 프로 오지라퍼의 삶은 극한의 정신무장을 통해서만 가능한 영역이다. 


오지라퍼의 가장 큰 덕목은 자신의 오지랖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상처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묻지도 않은 고민을 찾아내 집요하게 참견하고, 그 조언이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그냥 폐기되었을 때 그냥 쿨하게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프로 오지라퍼의 삶을 가장 뿌듯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나의 오지랖을 통해 상대가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오지랖 인생에 그런 일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야구와 마찬가지로 프로 오지랖에도 3할 타율이면 꽤나 준수한 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오지랖의 좋은 예

직원으로부터 긴급한 연락을 받았다. 영상회사를 운영하는 한 지인이 기획사 창업에 투자한다는 소식을 나에게 전하며 조언을 구했다. 나는 그 대표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우리 직원이 매우 걱정하는 탓에 그 투자 제안서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사실 살펴보나 마나 그 제안서는 형편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투자를 해야 할 이유가 1도 없었지만 그 대표님은 투자를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한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그 대표님에게 이 얘기를 어떻게 전달해야 그가 납득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직원에게 다짜고짜 그 대표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주변 지인들의 말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그 사람을 생면부지의 내가 과연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망설인다면 프로 오지라퍼가 아니지...


다행히 다음 날 오전부터 만남이 성사되었다. 평소 기획사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그 대표님은 마침 지인이 기획사를 창업하는데 투자 요청을 받고서 많이 흔들린 것으로 보였다. 왜 투자를 하면 안 되는지, 그 사업제안서의 불합리성을 강조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으로 판단이 되어, 나는 우회하는 방법을 택했다.


우선 내 창업 5년간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려주었다. 처음 1년 동안 몇 명의 인원으로 얼마의 매출을 올리고, 그래서 얻은 손실이 얼마였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고난과 역경이 따랐는지. 어느 정도의 노력과 행운이 있어야 그 손실을 다 만회하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낱낱이 설명을 했다. 


거의 2시간에 가까운 대화를 통해 그 대표님의 표정이 점점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이내 투자를 철회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고, 어떤 방식으로 통보를 할 것인지 고민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솔직한 고백이 이어졌다. 기획사로부터 일을 받아서 하다 보니까 기획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고, 마침 지인의 창업 투자 제안에 너무 쉽게 승낙을 해버린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죽어라 뜯어말리는 것을 논리적으로 납득하기도 어려웠고, 이미 승낙을 해버린 터라 명분 없이 생각을 돌리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획사의 실상에 대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막연한 환상이 산산이 깨져버려 오히려 쉽게 마음을 결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프로 오지라퍼의 9회말 투아웃 역전 끝내기 대타 만루홈런이 터진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님은 몇 번이고 회사 하나 살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오지라퍼로서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2시간 반에 걸쳐서 떠든 내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고, 에너지가 오히려 충전이 되는 기분이었다.  


② 오지랖의 나쁜 예

그날 저녁 업무를 마치고 출장 중인 숙소로 돌아왔다. 룸메이트 남직원과 아주 소소한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중고차를 보러 갔다 왔다는 말에 또 특유의 오지랖 레이다가 발동을 해서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는 30대 초반 남자 직원으로 2년 전 호기롭게 폭스바겐 신차(아마도 파사트?)를 뽑아서 얼마 전 할부금을 감당 못하고, 중고로 판 이력을 가진 친구였다. 이번에는 BMW 미니를 중고로 구입한다고 하여, 이건 좀 설득을 해봐야겠다 싶어 일단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BMW 미니 

- 인천 중고차 매매단지

- 중고 매매 가격 2500만원 (신차 4000만원)

- 선수금 500만원 제외 2000만원 중고차 할부

- 잔여 보증기간 6개월 (3년 보증에 2년 6개월 중고차)

- 키가 185 이상에 몸무게도 90킬로 이상


조건을 들으면 들을수록 사지 말아야 할 이유만 가득했다. 전국 최고의 사기꾼 집합소인 인천 중고차 매매단지에서 보증기간 6개월 남은 BMW 미니를 전액 할부로 사겠다는 생각을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조건이었다. 더구나 거구의 몸을 미니에 구겨 넣어서라도 타겠다는 그 의지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기 돈으로 무슨 차를 사서 업고 다니든 무슨 상관이랴. 하지만 얼마 전까지 할부금 때문에 맨날 돈 없다고 타령하던 그 친구를 봤을 때, 이번에도 어김없이 부족한 통장 잔고를 보며 후회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꼭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 돈이면 국산 준중형 SUV (투싼, 스포티지, 트레블레이저, QM3 등) 신차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기에 만약 국산 준중형 SUV 신차로 가면 내가 조금이나마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제안도 했지만 그의 미니를 향한 열정을 꺾을 데는 역부족이었다. 


사야 할 이유를 굳이 꼽아 보자면 "미니"라는 것 외에는 없는데, 그 하나의 이유가 모든 단점을 다 커버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임을 강조하며 의지를 불태우는 그를 더 이상 설득하고 싶은 이유가 사라졌기에 바로 포기하고, 프로 오지라퍼 임무 종료! 이런 결과가 나오면 오지라퍼가 아니라 그냥 꼰대 인증 각이다. 




언제쯤이면 이 길고 긴 오지라퍼의 인생에 막을 내릴 것인지. 좀 더 나이가 들어서 온 몸에 기력이 쇠하여, 내 인생 앞가림하기도 바쁜 처지가 되면 조용히 은퇴할 수 있으려나. 아마 죽기 전까지 쉽게 은퇴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냥 이대로 사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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