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는 생각과 다르다

전 그냥 튀겠습니다.

by 돌터졌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호신술을 가르쳐주는 장면을 봤다. 상황극을 해가면서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껴안았을 때, 또는 앞에서 안았을 때 탈출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서 항상 빠지지 않는 말이 이러이러하게 움직이다가 무릎을 들어 급소를 딱! 때리세요. 그럼 누구라도 쓰러진다는 것이다. 그럼 교육받은 사람은(대부분 여자였다.) 아. 그렇군요. 라며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그 장면을 보고 뭐 별거 아니네. 그러니까 팔을 이러저러하다 급소를 차라는 거 아냐. 간단하네. 뭐.

나 역시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훗. 치한 따위 내가 처리할 수 있어. 별거 아니구먼.



학교에서 수다를 떨다 가끔 변태를 봤다는 친구들 이야기도 들었다. 불쾌해하는 친구도 있었고 아무렇지 않게 기분 더러워서 욕 한 바가지 해줬다는 친구도 있었다.

야. 나도 봤어. 너도? 난 한 번도 못 봤는데.

우습게도 '아... 우리 동네는 변태도 없어. 나만 못 봤어. 나만.'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영상으로나마 호신술을 익히고 변태 목격담을 짜증 내며 늘어놓던 친구들을 통해 나는 나도 모르게 한 명쯤은 내가 어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었나 보다. 그날 그 일이 있기 전에는.


학교 컴퓨터실이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기숙사 컴퓨터실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급히 보고서 내용을 일부 수정해야 했던 나는 학교 밖으로 뛰쳐나갔다. pc방을 찾아다니다 허름한 골목 안에 있는 pc방에 들어갔다.

카운터에 앉은 알바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은 체격이 작고 머리가 덥수룩한 내 또래 대학생 같았다. 많이 피곤한지 가냘픈 손목을 포개 손베개를 만들고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한 마리 작은 새 같았다.

난 내 볼일을 다 마치고 출력까지 하고 이층의 그 pc방 문을 열고 계단을 막 내려갈 참이었다.

밝은 이층과 달리 좁은 계단 아래 1층은 어두운 편이었는데 누군가 나타났다. 많이 봐야 15살쯤 되어 보이고 머리는 빡빡 깎은 남학생이었다. 정말 중학생 정도로 보였고 마르고 옷차림이 두서없었다.


두 명이 서기엔 좁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 내려가 봐야 계단 중간에서 어색하게 저 소년과 몸이 스칠게 뻔하기에 나는 그대로 서서 소년을 먼저 pc방에 들여보낼 셈이었다. 그 순간 소년이 입을 열었다.


"돈 내놔."


"?"


잘못 들은 건가? 돈 달라고? 계단을 아주 천천히 오르던 그 소년의 눈빛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다.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소년은 프로였다. 차분하게 날 비웃듯이 까만 눈으로 쏘아보며 다시 말한다.


"돈 다 꺼내. 안 주면 만질 거야."


녀석은 한 손을 펴서 허공을 향한 채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나보다 작은 키에 아담한 체격은 이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막혔다.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내가 어처구니없었다. 난 165의 키에 다부진 체격이었다. 초중고 통틀어 어디 가서 맞아본 적도 없고 누구한테 쫄아본 적도 없었다. 급소고 나발이고 그 순간엔 생전 처음 느껴본 분위기가 공포 그 자체였다.

내가 저런 중딩이한테? 같은 의문조차 들지 않았다.


녀석이 더 다가왔고 난 재빨리 왼쪽으로 몸을 틀어 나왔던 pc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카운터에는 알바생이 여전히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저... 저 제가. 지금. 어. 밖에 누가 있어서 그러는데요. 조. 조금만 있다가... 아니... 어..."


침착하려고 했지만 말을 자꾸 더듬었다.


"누가 있다고요?"


고개를 든 알바생이 목이 잠겼는지 굵은 목소리로 물어보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내 얼굴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했는지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더니 문득 혼자. "아... 그 새끼..." 작게 중얼거렸다.

내 앞으로 다가와서 "저기 앉아있어요. 잠시만요." 그러고는 출입문을 열고 나갔다.


"야이 c발 새끼. 뒤질래? 이 새끼가 오늘 처맞을라고. 너 내가 또 오면 죽는다고 했지?"


카운터에 바짝 붙어있던 내게 알바생이 다시 돌아왔다.

"그 새끼 갔는데 지금 가세요. 아. 그냥 제가 지금 계단 내려갈 테니까 따라오실래요?"


아이고 네. 사장님. 감사합니다. 그래 주시면야 저야 감사하죠.


날렵한 체격에 머리숱도 많은 것이 이소룡처럼 듬직한 이 멋진 알바생님을 따라 계단을 내려왔다. 골목을 벗어나 사람 많은 큰길 근처까지 날 데려다주고 다시 되돌아가는 그 사장님. 아니 알바생님에게 감사하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호신술은 개뿔. 에이씨 그런 거 다 그냥 예능이었구나. 닥치면 써먹을 수가 없구나. 깊은 깨달음이 왔다.





그해 여름 우리 과에서 바다로 MT를 갔다. 모래사장에서 2인 3각 경기가 펼쳐졌다. 나와 준호가 한 팀이었는데 맨발로 모래사장을 뛰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내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버벅거리자 갑자기 준호가 오른팔로 내 허리를 휘감더니 그대로 들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바람 빠진 풍선인형처럼 준호한테 매달린 채로 허우적거리며 결승선에 들어왔지만 어쨌든 이겨서 기분 좋았다.




"이모! 나 이번에 검도 시작했어. 몇 년 배우면 막대기만 들어도 최강이래. 누구와 싸워도 막대기만 있으면 다 이긴다는데? 검도 짱이지?"


"야."


"왜?"


"그냥 튀어."


"응?"


"검도 배워서 막대기 주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튀라고. 튀는 게 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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