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키운 팔 할은...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을 알아본다.

by 돌터졌다

대학 졸업반인 조카가 오랜만에 집에 놀러 왔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조카는 졸업 후 자신이 원하던 직장에 입사할 예정이다. 항상 조용조용 자신이 할 일을 해내고 있었고 내성적인 줄만 알았는데 오래된 친구들의 모임도 탄탄하게 잘 꾸려갔다. 철마다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며 서로의 연애관, 결혼관에 대해서도 터놓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신생아 때부터 봐온 조카여서 그런지 자식 같았다.


찾아온 조카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자살, 우울 충동이 높다고 해서..."


"네가? 누가 그래?"


조카가 다니는 대학교 학생 지원 프로그램 중에 심리검사가 있었나 보다. 심리검사를 어디서 받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조카의 심리 검사 결과가 자살. 우울성향이 매우 높다고 나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아무튼 학교에서 조카에게 몇 주간의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권했고 조카는 처음에 거절했지만 학교 측에서 꼭 받아야 한다고 했단다. 그렇게 억지로 심리상담을 처음 받게 된 조카는 상담 중반부터는 진지하게 속 이야기를 꺼냈나 보다. 그리고 상담을 마친 날. 내 집으로 날 만나러 온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힘들고 외로웠는데 그래도 내가 버틸 수 있었고 모나지 않게 잘 큰 건 나를 온전히 받아주고 지지해준 사람이 한 명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


"그랬구나. 근데 너 어려서 다들 너 좋아하고 사랑했어. 집안의 첫아기라 귀하게."


"알지. 근데 그건 이모. 그런 거 있잖아. 내가 잘해야 이쁨 받는다는 느낌. 자꾸 내가 뭘 노력해야 얻어지는 그런 사랑 같은 거였거든 나한테는. 이모 알잖아. 할머니 캐릭터."


알지. 자알 알지. 내가 또 우리 엄마 매력에 지옥을 걸어봤지.


조카가 태어나고 석 달도 되기 전에 이혼을 한 언니는 조카의 양육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비난하고 싶지는 않은 게 출산과 이혼이란 인생의 엄청난 스트레스를 몇 달만에 모두 겪은 탓이 크지 않았나 싶었다. 언니는 조카가 3살 즈음에 재혼을 했고 언니의 결혼식날 나는 유일하게 참석을 하지 않고 어린 조카를 돌보고 있었다.

재혼을 반대한 사람도 나였다.


"나는 진짜 힘들었거든. 물론 정말 좋은 아빠 만나서 큰 거는 지금도 감사해. 그런데도 내가 외롭고 힘들 때는 늘 이모가 내 옆에 있었더라. 모두 시간이 나면 날 봐주는데 이모는 날 먼저 봐주는 사람이었어."


내 나이 18살에 태어난 조카. 어렸지만 조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책을 읽어주고 옷을 선물하고 어린이날에는 내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찾았다. 항상 너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지.


"상담 선생님이랑 이야기하면서 알게 됐어. 지금까지 내가 잘 크게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 이모라는 거. 상담 선생님이 이모한테 그 마음을 표현하면 어떻겠냐고 하길래. "


"그래서 지금 나한테 뭐. 그거. 효도 같은 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니. 내가 이모한테 받은 사랑을 나는 00 이한테 주려고."


외동인 내 아이 00 이에게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선물로 사주고 몇 시간을 같이 놀아준 조카는 또 오겠다며 약속했다. 손 흔들어 인사하고는 휘적휘적 긴 다리로 집을 나선다. 내 팔에 안겨 울던 작은 아이가 훤칠한 청년이 되어 걷고 있다.


조카는 이제 완전히 내 품을 떠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슬기롭게 과거에 감사하고 또 다른 자신의 역할을 찾아냈다. 거북하지 않게 자신이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만큼만 선을 지키면서 베푸는 법도 익혔다.

이제는 나와 완전히 동등한 성인으로 마주 보고 서서 나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다.


그래. 안녕. 잘 가. 네 인생 속으로.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일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출처 :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






이전 01화동태는 도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