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람은 참 착해요.
아침에 눈뜨자마자 라디오를 켠다. 따뜻한 침대에서 꼼지락거리다 보면 어느새 늦잠자기 일쑤여서 라디오 켜기가 습관이 돼버렸다.
"출근하기 싫을 때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또는 출근길에 겪었던 일들을 사연으로... 직장생활이 짜증 나고 나를 힘겹게 해도 꾹 참고 일하는 나를 격려하는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느릿느릿 양치질을 하다가 순간 불끈했다. 아침부터 불끈하다니. 오랜만이다. 봉인된 나의 반골기질이 매운 치약 냄새처럼 스멀스멀 올라온다.
직장생활의 애환과 출근하기 싫은 날 극복하는 나만의 팁이 있다면 사연을 보내달라는 것으로 나는 해석했다.
어이가 없었다. (물론. 나만. 주관적으로다가. 네.)
급히 양치질을 마치고 약간의 요금을 내고 그 프로에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요즘 유행이 뭔지 민감하실 텐데 유감입니다. 여기저기 젊은이들의 퇴사 브이로그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전 재산을 던져 차린 사업이 망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겁니다. 아침에 눈을 떠 어디든 가서 한 달 쌀 값이라도 벌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과연 얼마나 공감이 되는 주제인지. 이 아침 출근길에 오르는 사람만이 듣고 있지는 않다는 걸 생각해주세요."
나는 쌀값을 걱정하고 집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지만 사지가 멀쩡하지만 어디든 출근할 수 없는. 그래서 곤란한 사람이 듣는다면 참 기분이 씁쓸하겠다 싶었다.
승진보다 지금 여기서 한 달이라도 더 버티고 싶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스산한 세월이다.
그리고 더 공포스러운 것은 내년엔 이 스산함이 뉴 노멀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어느 아주머니 한 분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다. 무슨 일이시냐고 묻는 직원에서 뭐라고 속삭이듯 말을 꺼낸다.
아이가 학교에 제출할 서류가 있는데 그 양식을 좀 출력해주었으면 고맙겠다는 용건이었다.
(보통은 학교에 제출할 서류는 학교에서 양식을 미리 나눠주고 있다. 분실 시 요청하면 기꺼이 출력해주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학부모의 편의를 위해 대단히 노력하는 학교가 많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은 일러주는 홈페이지를 찾아들어가 양식을 다운받고 출력 버튼을 누른다.
그 와중에 아주머니는 감사하다며 무안해서인지 미안해서인지 안 해도 될 말까지 하고 있다.
"동네 피시방에도 갔는데 요즘은 출력 같은 거 안 한다고 하고 동사무소에 물어도 봤는데 힘들다고 하고 지역 도서관은 오늘 문 닫는 날이고..."
여길 찾아온 아주머니의 재치가 가상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50을 넘긴 조직의 2인자가 들어선다. 다른 볼일을 보러 우연히 들어왔던 그는 사무실에 낯선 아주머니를 보고 묻는다.
"근데 누구신데 여길? 학부형이신가?"
출력을 다 마친 직원이 짧게 대답한다.
"아. 네. 출력을 좀 하고 싶으시다길래. 다 끝났습니다."
그러자 2인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심인 듯 놀란다.
"출력? 왜 여기서 하세요? 집에서 하시면 되잖아요?"
그러게요. 집에서 편하게 하시면 되는데. 왜 여기서 하실까요.
점심식사 후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 간단한 글 하나를 쓰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에 대한 견해가 주제였다. 또닥또닥 키보드를 두드리다 그 유명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문구를 쓰고 멈칫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재정을 낭비하고 남편을 무능하게 만들었다는 죄로 프랑스 국민의 분노를 샀다. 그녀가 프랑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오스트리아의 공주였다는 점도 한 몫했다. 굶주린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사치가 심했다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백성을 향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했단다. 그녀가 죽어야 할 이유는 명백해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을뿐더러 재정을 낭비하기는커녕 가축을 기르고 간단한 농사를 지을 정도로 소박하고 검소한 편이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정말 했는지, 정말 방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고 백성의 분노에 어떻게 활용되었는가 눈여겨보고 싶었다. 혁명군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의 타락한 이미지였다.
가끔 나는 내가 편한 대로 상대방을 해석하곤 한다. 뭐 신이 아닌 이상 당연한 일이겠지만 내가 내 주관에 상대를 끼워 맞춰 해석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부끄러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여전히 나는 어리석고 실수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 부끄러운 점이고 또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며 반성하는 것 자체가 좋은 사람이라는 점에 안도하는 것이다.
실업자가 넘쳐나도 힘들게 출퇴근하는 직장인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구직자와 실업자에 비하면 감사한 줄 알고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는 말은 또 다른 폭력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자신의 행복을 죄스러워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내가 라디오 프로에 보낸 의기양양한 문자가 나의 잘못된 인지 편향인 것처럼.
집안에 프린터기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도 있다. 궁핍을 모르는 사람은 궁핍을 학습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누군가 라면 한 박스에 천 원이라고 광고하는 마트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향해 몸에 좋지도 않은 라면을 왜 사 먹나요 라고 물어본다면 처음 한 번쯤은 가르쳐줄 수 있다. 너처럼 돈이 숨 쉬는 공기와 같이 당연한 사람은 거의 없다라는 사실을.
중요한 것은 궁핍을 알고 나서도 궁핍을 조롱하는 것이 문제다.
출력물을 소중히 받아 들고 문을 나서며 아주머니가 직원과 50을 넘긴 조직의 2인자에게 거듭 감사인사를 한다.
"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시라는 50을 넘긴 조직의 2인자는 다시 생각해보니 그 나름대로 훌륭했다. '아줌마 다시 여기 오지 마세요' 면박을 주지도 않고 '거. 왜 쓸데없이 외부인 편의를 봐주냐'며 직원을 혼내지도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살다 보니. 집에 프린터기 하나 없는 사람도 있구나 알았을 테고 용기 낸 그 방문에 안녕히 가시라는 마음은 50을 넘긴 조직의 2인자로서 조직 운영에 아주아주 조금은 반영이 될 수도 있을 테다.
스산한 세월에도 여지없이 태양은 떠오를테고 한없이 따뜻할 것을 잘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