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맥주 한 잔 할까요

술이 아깝다는 말.

by 돌터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술에 취해본 적 없다. 이 나이 되도록 취해본 적 없는 게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

예전의 나는 항시 몸가짐을 바로 하며 밖에서 양말 한번 벗어본 적도 없고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적도 없었다.

그것이 자랑인 줄 알고 살아왔으니 얼마나 팍팍한 위인인지...


세 번째 발령받은 직장에서 회식을 할 때면 조용히 구석자리에 앉아 얌전히 식사만 하고 일어서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보다 다들 나이가 10살 이상 많게는 30살 이상 차이나는 분들이 대부분이라 오히려 더 편안했다. 자리만 채우고 있다가 퇴청들 하시면 집에 가면 그만이었다.


그녀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어린 그녀는 높고 상냥한 목소리로 생긋생긋 잘도 웃었다. 모든 남자들이 사랑하는 여인은 잘 웃는 여자라는데 그녀는 남자들의 가슴을 후벼 파고도 남게 웃고 있었다. 사감처럼 근엄한 표정의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매력적이었다. 150을 조금 넘는 앙증맞은 키에 키높이 실내용 샌들을 신고 작은 새가 날아다니듯이 종종거리며 걸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칼은 고데기로 컬링이 잘 되어 등에서 나풀거렸다.

그녀가 사랑스럽고 부러웠다. 항상 대답도 네에엣. 네에엣. 노래를 부르듯 했다.


가슴이 꼭 달라붙는 옷을 입어도 전혀 야해 보이지 않고 학예회 발표 나가는 어린이처럼 싱그럽고 귀여웠다. 알프스의 하이디가 잠시 알프스 땅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물어보러 들린 듯 구김살 없이 명랑했다.

저런 옷을 나도 입어보고 싶은데 내가 입으면 보나 마나 속옷 같아 보일게 뻔했다.

회식자리에서도 그녀는 나와는 달랐다. 구석에 앉아 밥을 먹고 있으면 부장님이나 신규 발령받은 분들이 술병을 들고 나에게 오셨다. 잘 부탁합니다. 라며 내 술잔을 찾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가 술잔을 들면 쪼르륵 잔을 채워주었다. 고맙습니다. 우물거리며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축였다. 물론 공손히 나도 한잔 따라드렸다.

어디 가서 어른 앞에서 술을 마셔본 적도 없어서 주도(酒道)도 몰랐다.

내 앞에 놓인 술을 마시는 척하다 탁자 밑 물컵에 살며시 붓기도 하고 잔이 비면 안 될까 싶어 몰래 물을 따라 놓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음. 한심했군...)

그녀는 달랐다. 첫 회식 날 술 한 병을 손에 들더니 제일 높은 분에게 다가가 생글거리며 술 한잔을 올렸다.

잘 부탁드릴게요~. 보고 있는 내 눈이 녹을 만큼 치명적인 미소였다. 그렇게 그녀는 그다음 분, 또 그다음 분. 호봉 순서대로 기막히게 한 잔씩 술을 올렸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노래도 멋들어지게 불렀다.

"외로운 밤이면 밤마다.~~"

그날 나는 그녀에게 "00 씨는 작은 새처럼 사랑스러워요. 하이디 같아. 어쩜 이렇게 성격도 밝은가요." 웃으며 앞으로 서로 잘 지내보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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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후 2시까지 처리됐어야 할 공문이 있었다. 지금은 전자문서시스템이 일상이지만 그때만 해도 종이로 출력된 공문을 손에 쥐고 나이 지긋한 부장님들이 대면하며 협의하던 때였다. 활자중독에 가까웠던 나는 매일 아침 새로 수신된 모든 부서의 공문을 훑어보는 버릇이 있었다. 일 년 넘게 해온 버릇이라 짧은 시간에 수십 개의 공문 내용이 머리에 저장됐다.


6일 아침부터 작은 소란이 있었다.

왜 2시까지 참석여부를 보내지 않느냐는 상급기관의 전화를 받고 우리 조직의 1인자가 관련 부장을 찾은 것이다. 하필 상급기관의 담당자가 1인자와 친분이 있었고 부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우리 조직의 1인자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평소 내가 존경하고 있던 관련 부장님은 당황하며 노란색 낡은 파일 서류를 열심히 뒤지기 시작했다.


"그. 그런 내용의 공문이. 참..."


공문이 없을 뿐 아니라 내용도 전혀 모르고 계신 듯했다.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안경을 연신 쓸어 올리며 서류를 넘기고 계신다. 우리 1인자께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셨고 보고 있던 내가 살며시 부장님께 다가갔다.


"부장님. 이 주전쯤에 대회가 열렸었고 3명이 출전했어요. 그리고 며칠 전에 수상자 참석여부를 보고하라는 공문이 왔었어요. 수상자가 없을 시 회신하지 말라는 내용도 있었고요. 우리는 수상자가 없어서 회신하지 않았다고 정리하시면 어떨까요. 상급기관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부장님은 바로 전화를 걸어 상급기관에 수상자 없음을 알렸고 상급기관에서는 확인 후 오히려 잘못 알고 독촉을 한 것에 사과했다. 이름이 비슷한 다른 곳과 착각했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우리 00 부장님이 얼마나 꼼꼼하신데..."


1인자의 말에 한 숨 놓으신 듯 부장님은 공문을 다시 차분히 뒤지기 시작했다. 별거 아닌 하찮아 보이는 일에도 자신의 업무능력과 연관 지어 자존심 상해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만약에 수상자가 있었는데 우리가 알려주지 못했다면 본선에 못 나간 거 우리가 책임졌어야 할 상황이었어. 큰일 날 뻔했네." 부장님은 다행이라고 했다.


드러난 사건의 전말은 엉뚱하게 그 불똥이 나에게 튀었다.


애초에 그 공문은 하이디 그녀가 관련 부장에게 전달해야 했다. --그러나 관련 부장이 자리에 없자 하이디 그녀는 관련 부장과 같은 사무실을 쓰는 내 자리에 공문을 올려놓고 대신 전해달라고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나는 그 공문과 메모를 보지 못했다. ) 그러니 이 모든 책임은 공문과 메모를 보지 못한 내 잘못이지 않냐는 것이었다


이것이 하이디 그녀의 입장이었다. 코가 막히고 기막힌 상황이었다. 부장님 앞에서 그녀는 억울하다고 했다.


"하이디 씨. 상급 기관에서 이거 담당자 누구냐고 전화 오면 내가 받아요 아니면 하이디 씨가 받아요?"


"제가 받죠."


"그럼 내가 전해주지 않아서 처리 못했다는 게 말이 될까요 안될까요?"


"......"


낮은 내 목소리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갑자기 흑흑 울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극적으로 몸을 비틀어 뛰쳐나간다.


그리고 한 시간쯤 뒤에 내 책상 전화가 울린다.


"난데. 잠깐 탕비실에서 봐."


나보다 8년 선배의 호출이었다. 8년 선배의 옆 자리는 바로 그 하이디 그녀의 자리였고 울며 뛰쳐나간 하이디 그녀와 나 사이에 갈등이 생길까 싶어 우릴 토닥여주려나 보다 싶었다.

아. 나 원... 애들도 아니고. 가서 쎄쎄쎄라도 해줘야 하나.

짜증이 났다. 그래도 뭐 맞춰줘야지. 손 잡고.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친구야. 해야지 뭐. 싶었다.

(이런 바보 같은 나 자신 같으니...)



탕비실에 그녀와 나. 8년 선배가 모였다.


"업무분장 그렇게 칼같이 따지고 들면 한도 끝도 없어. 다 같이 한다 생각하고 하는 거야. 알겠지?"

8년 선배의 말이 날카롭다.

그냥 듣고만 있었다. 선배 옆의 하이디 그녀에게 좋은 구경거리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뭘까 생각했다. 여기서 내가 흥분해서 자칫 선을 넘으면 중재? 하려는 선배한테 대드는 공식적인 미친놈이 되는 것이다. 로봇처럼 표정 없이 바라봤다. 말을 마친 선배가 일어서자 하이디 그녀도 일어선다.

"그리고 00 씨. 키 그렇게 큰 거 아냐. 우리가 작은 새면 00 씨는 큰 새야?"


문을 나란히 나서는 그 둘의 키가 똑같아 젓가락 한 쌍 같았다.


어이가 없네.


그녀는 지금. 자기가 메모 남겨 부탁한 공문을 내가 일부러 없애고 전하지 않아서 자신을 곤란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담당자를 따져 자신을 공개망신 줬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키 작은 8년 선배까지 묶어 작은 새라고 했다는 거야?


그녀의 도발에 더러운 기분을 끌어안고 친구와 생맥주 한 잔을 마셨다. 한 잔 더 마셨다. 팔과 다리가 지르르하면서 어색하게 느껴진다.


야. 술 좋구나야~ 이렇게 좋은 걸 회식 때마다 빼고 버린 거야? 내가? 야이 c~ 하극상당할 만하네.


그런 내가 불쌍했는지 친구는 야무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너. 똑바로 들어. 넌 곰이고 걔는 작은 새가 아니야. 내가 대처법을 알려줄 테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앞으로는..


퇴근 후 마시는 술 한 잔은 날로 나를 레벨업시켜주었다. 곰이 작은 새는 될 수 없어도. 아드득 아드득 다 띠버버릴끄아~


현장 쪼렙에서 만렙으로. 술과 함께. 휴. 노가리도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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