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즐겨 읽었던 것이 '노인과 바다'였다. 나에게 노인과 바다는 좀 의미가 있는 책이다.
무슨 이유였는지 몰라도 그 책을 읽을 그때 나는 이틀은 넉넉히 굶은 상태였다.
전후 사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려서부터 고집이 센 나는 심사가 뒤틀리면 굶는 것으로 속풀이를 하곤 했다. 어차피 엄마에게 소리 질러 대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라 방구석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장롱을 괜히 두 발로 밀어 대거나 밥 먹으라는 소리에 이불을 둘러쓰고 움직이지 않았다. 얄미운 자식 훈육에 이골이 난 엄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혼자 책장 앞에 누워 계림 출판사의 세계문학 전집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다 '노인과 바다'를 끄집어내 읽었다.
이미 익숙한 내용들을 휘리릭 넘겨 내가 원하는 부분을 찾았다.
바다로 나간 노인이 작은 배 위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대목이 몇 군데 나온다. 다랑어를 잘라내 먹거나 돌고래를 잡아 그 고기를 씹어 먹으며 살이 단단하고 달착지근하다고 한 것으로 기억난다. 날치는 입에 집어넣고 꼭꼭 씹어 통째로 먹어버린다.
다들 잘 알고 있듯이 헤밍웨이의 문체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다. 표현이 잡다하지 않고 간결하며 정확하다. 게다가 감정을 절제하는 듯 냉정하게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체다(조금만 손보면 기사에 가깝다. 사실. 헤밍웨이는 종군기자이기도 했고.)
아무튼 건조하게 노인이 물고기를 씹어 삼키는 장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장면에 이틀이나 굶은 내가 침을 꿀꺽 삼킨 것도 당연했다. 그런 부분들만 찾아가며 두 번 세 번 읽었다. 노인이 반짝이는 물고기 비늘이 묻은 칼을 조용히 흐르는 바닷물에 담갔을 때 나도 배부른 식사를 마치기도 했다.
식사 도중 노인이 문득 후회한다. 해가 아직 남아있을 때 뱃전에 바닷물을 조금 뿌려뒀더라면 지금쯤 말라 소금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더욱 훌륭한 식사가 됐을 텐데 아쉬워한다. 그러자 곧바로 내 혀끝에 짭조름한 소금 알갱이가 느껴진다. 고기를 바닷물에 슬쩍 찍으면 안 되려나? 노인이 안타깝다. 하지만 바다에 인이 박힌 노인이 그런 걸 모를 리 없다. 노인이 원하는 것은 뱃전에 미리 뿌려 말린 옅은 소금 알갱이다.
온통 소금으로 가득한 바다 위 작은 배 안에 앉아 소금 알갱이를 아쉬워하고 있는 노인. 갑자기 수염이 가득한 잘생긴 헤밍웨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해가 아직 남아있을 때 뱃전에 바닷물을 조금 뿌려뒀더라면 지금쯤 말라 소금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노인이 노인에게. 헤밍웨이가 헤밍웨이에게 하는 말이었다. 물고기를 죽이려고 지루한 싸움을 한 노인은 이제는 잡은 물고기를 상어로부터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전쟁터를 앞장서 활개 치고 목숨이 두 개인 것처럼 이런저런 사고를 벌여도 끄덕 없이 살아난 헤밍웨이는 스스로 죽어버린다.
하드보일드 한 그의 문장을 다시 뜯어 읽어본다. 물론 나야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 감정의 수식이 화려하지 않은 그의 문장은 나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그 문장 하나에 헤밍웨이 죽음의 비밀이 담긴 양 집중해본다.
넓고 넓은 바다 위에 떠서 소금을 찾는 노인. 그저 한 줌 바닷물을 뿌려둘 것을 아쉬워하는 노인.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뱉은 말치고는 허망하다. 아니 한편으로 위안이 되기도 한다.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는 내게 배고픔을 달래주는 용도가 아니라 지친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편지가 되었다.
나는 무엇을 놓쳤을까.
나는 무엇을 했어야 했나.
젊음과 아름다움이 넘쳐나던 그 날들. 딱 한 줌 건져 올려 아직 밝은 태양 아래 슬쩍 뿌려야 했던 것들.
까맣게 저문 바다 위에 동동 떠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나. 내겐 총도 용기도 없으므로 아직은 버텨야 하겠지.
노인과 바다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결국 노인은 집에 돌아왔으니까. 나도 그처럼 너무 늦지 않았길 바라본다.
인생이란 바다.
지나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