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수련이 부족합니다.
한동안 아파트가 난리도 아니었다. 이사철에는 가끔 뚝딱뚝딱 공사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올봄처럼 유난스러웠던 적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몇 호가 리모델링을 한다는 공지가 붙어있기가 일상다반사였다.
바로 우리 아랫집에서 공사를 한다는 공지를 보았다.
새로 이사를 오시는 분이 리모델링 공사를 대대적으로 하시려는지 공사기간이 꽤 길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밑으로 땅이 꺼지는 우르릉 우르릉 소리가 하루 이틀 정도 들렸다.
문득 나는 일어나 옷매무새를 만지고 집안이 너무 어수선하지 않은지 둘러봤다.
꽤 진지하게 내가 그랬던 이유는.
아랫집 천장, 그러니까 내 집 방바닥이 뚫려서 내가 아랫집으로 떨어질 상황을 대비하려던 것이다.
음... 난 진지했다.
정말 내가 아랫집으로 추락하는 순간 정갈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달까.
훗. 나란 사람...
기골이 장대한 윗 집 아들들(아들들의 친구들들까지...)의 축구실력을 오감으로 느끼며 살아온 지 이미 십여 년이 가까워서인지 꽤 잘 참는 나였지만 심장이 쫄깃쫄깃해질 정도로 피곤했다.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내가 없으면 집에 혼자 있을 강아지는 얼마나 불안할까 싶어서 참았다. 그렇게 공사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고 어느 날 현관 앞에 종량제 봉투가 놓여 있었다. 안을 보니 마스크와 키친 타월 등이 정갈한 편지와 같이 들어있었다.
편지에는 이사했으니 떡을 돌려야 마땅하나? 코로나로 인해 간단한 선물을 준비했으니 받아주시라. 공사 소음으로 피해를 드려 죄송하다는 인사가 적혀있었다. 아니 뭐 이런 멋진 분들이 다 있을까.
그날 바로 약국에 들러 피로회복제 한 박스를 사뒀다. 잘 받았다고. 새로 이사한 곳에서 행복만 가득하시라고 나도 답장을 써서 주고 싶었다. 그렇게 곱게 봉지 안에 넣어두고 언제 줄까 기회를 노리다 무색한 며칠이 흘렀다. 망설이다 애매한 시간이 흐르자 더 망설여졌다.
답례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가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했다.
소음에 고통받은 건 사실이니 인사는 감사히 받고 대신 나도 다음에 비슷한 일 있으면 그때 인사할까 변명도 했다. 별거 아닌 피로회복제 한 박스를 두고 나 혼자 썸을 타는 기분이었다. 상대는 아랫집 주인.
그러다 내가 주문한 책장이 배송됐다. 배송기사님이 집안으로 들어와 박스를 열고 후다닥 조립을 시작했다.
엄청나게 마른 분이었다. 나이는 30대쯤으로 보였는데 정말 마른 분이었다. 저렇게 가느다란 팔과 다리로 무거운 책장 박스를 들고 오다니 다시 봐도 남자의 힘이란 신기했다.
그렇게 조립을 다 마친 배송기사님이 집을 나설 때 난 나도 모르게 갑자기.
잠시만요.
후다닥. 사뒀던 피로회복제 한 박스를 내밀었다. 이거 차에 두고 드세요. 물론 괜찮다고 사양하셨지만 다시 드렸다.
이제 아랫집과 나 혼자 타던 썸이 끝나 홀가분한 기분까지 들었다.
어딘가 내 연애 패턴과 비슷했다. 가슴 설레게 내 속을 후벼 파던 썸 타던 사람 내버려 두고 뜬금없이 엉뚱한 사람에게 내밀었던 내 손. (손모가지...)
금사빠의 비극이지 뭐.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