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빡침이란 이런 것인가.
"다른 학원에 레벨테스트 한번 보러 가고 싶어."
종종 있는 일이다. 실력도 점검할 겸. 문제는 이번에 레벨테스트받으러 갈 학원은 그전에 잠깐 다녔던 학원이라는 거다.
그 학원에 친한 친구가 다녀서 등록을 했는데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속상한 일이 생겼다. 그 친한 친구가 주먹으로 아이의 어깨를 때렸다. 그것도 아주 세게 맞았는지 집에 와서도 내내 아프다고 했다.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고 선생님이 알고 계셨고 그 친구에게 사과를 하라고 하셨다. 그 친구는 본인이 오히려 맞았다는 둥 거짓말로 모면하려다 결국 사과를 했단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 사과를 받아줄지 말지 고민이라고 했다.
일단 아이 어깨 상태를 살펴보고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어서 안심했다.
"왜? 화가 아직 안 풀린 거야?"
물어보자 아이는 믿었고 많이 좋아했는데 정말 그냥 다가가 무슨 게임하냐고 물었을 뿐인데 주먹을 날려서 무안하고 수치스러웠다고 했다.
"그래. 좋아. 네가 그럼 그런 거지. 사과한다고 다 받아주고 용서해주란 법은 없지. 그러고 싶으면 그래야지. 용서는 네 마음이야. 엄마도 찬성이야. 폭력 쓰는 친구는 나도 별로야. 아무리 좋아해도 폭력은 손절 1순위지."
내심 아이가 주관이 있어 보여 흐뭇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같이 다니던 학원인데 굳이 불편하게 계속 봐야 하나 싶었다. 아이와 상의 끝에 학원을 그만두기로 했다. 학원 선생님께는 좀 쉬겠노라고 이야기했고 그렇게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아이가 다시 그 학원에 레벨테스트를 받아보고 싶다고 한다. 원장 선생님은 좀 괴팍했지만 수학선생님은 정말 잘 가르치시는 분이었다면서.
학원에 전화를 걸어 레벨테스트 날짜를 잡는데 원장 선생님이 그때 왜 갑자기 그만뒀는지 물어본다. 노련하게 물고 들어오는 그 솜씨에 몇 번 말을 돌리다가 딱히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아서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같이 다니던 친구랑 좀 껄끄러운 상황이라 그만뒀었어요. 물론 지금은 서로 소 닭 보듯 하게 됐구요."
이 말에 갑자기 원장 선생님은 그게 누구냐, 진작 말했으면 조치해줬을 텐데 왜 말 안했냐. 성실히 공부하던 애가 갑자기 그만둔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아느냐. 상대 아이가 아직도 학원에 다니냐 이름을 말해라.
난리가 났다.
"아뇨. 오래전 일이고 굳이 지금 다시 얘기할 필요는 없구요. 상대 아이 입장이란 것도 있으니까요."
아니란다. 그건 그거고 일단 자기가 누군지 알아야 학원을 다시 다닐 때 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대처를 할 수 있단다. 그냥 레테 보지 말까. 싶었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수학선생님이 거기 있으니까 나는 또 한 번 부탁했다.
"그 이야긴 이쯤에서 정리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편하게 레테도 보러 가죠."
작게 한숨을 내쉰 원장 선생님이 정해준 날짜 시간에 맞춰 아이와 같이 방문했다. 인사를 나누고 책상 앞에 앉아 시험지를 주기만 기다리고 있는 아이와 나에게 원장 선생님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이 실력이야 그전에 다녔으니까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고 그때보다 단계만 올려서 수업하면 되고요. 중요한 건 그 문제가 있었던 친구가 누군지 제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학원을 다니다가 또 그 친구랑 껄끄러우면 제가 차단을 해줄 수 있거든요"
아이고 머리야. 이미 전화로 거듭 매듭지었다 생각했는데 아이 앞에서 또 그 말을 꺼내니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이런 문제 하나 깔끔하게 하지 못해 엄마로서 아이에게 부끄럽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만 이야기하자 한 것을 대놓고 또 이야기하는가 싶어 굉장히 불쾌했다.
"제가 비밀은 정말 잘 지킬게요. 누구랑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말하는 그 사람의 귀에서 달랑거리는 귀걸이를 말없이 째려보았다. 속이 후끈 달아오르고 비상 벨소리가 들렸다. 어금니를 살짝 깨물다가 고개를 홱 돌려 아이를 쳐다보고 말했다.
"이 문제로 이야기하는 거 불편하지 않아? 넌 괜찮아?"
아이는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다.
"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아니. 어머니. 그럼 다음 주부터 학원에 나오는 걸로 알면 되나요? 아까 수학선생님이랑 이야기는 다 해놨어요. 오늘 오신 김에 등록하고 가시죠."
" 그건!... 집에 가서 아이와 이야기하고 결정할 거고요. 지금은 등록하러 온 게 아니라서요. 가보겠습니다."
학원 밖으로 나와 아이와 나는 동시에 크게 숨을 내뱉었다.
"엄마. 나 갑자기 기억이 떠올랐어. 저 학원 다닐 때 저 원장 선생님이 어땠었는지. 정말 집착 끝판왕이야. 수학선생님은 진짜 실력 있고 좋은데. 수학선생님이 따로 독립해서 공부방이라도 차렸으면 좋겠다."
아이말에 기분이 좀 풀어졌다. 그런 자리에 아이를 데리고 갔다는 게 진짜 후회스러웠던 참이었다.
"그러게. 어쩜 수학선생님도 그러려고 월급으로 창업자금 모으실지도 모르겠네"
"그전에도 보면 수쌤이 제일 막내라고 원장쌤이 수쌤한테 부탁을 많이 하는 거 같아서 내가 다 속상하더라구."
"난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봉변당한 느낌이야. 그래도 나름 우아하게 분노 조절하고 나왔어. 너도 기분 상했지?"
"기분이야 안 좋지. 시간도 30분이나 버렸고. 근데 시험지 안 풀고 나와서 그건 다행이네."
학원장으로서 정말 학생의 마음을 헤아려주겠다는 의도도 있겠지만 당사자가 고만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계속 알아내려는 것은 나에게 폭력처럼 느껴졌다. 뭐 좋지 않은 경험을 여기저기 떠벌이고 다니고 싶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당신의 그 "입"을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를 굳이 모르는 척하는 비매너.
이쯤 되면 학생의 보호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궁금증을 풀려는 욕심이니까. 그러면서 연거푸 오늘 등록을 권하는 것도 듣고 있기 힘들었다. 맞네. 레벨테스트 보러 갔는데 시험문제는 구경도 못하고 나왔으니 기만당한 거네.
새벽에 혼자 책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상담받고 있는 선생님은 내가 지겨우실까? 하는...
과거에 내가 겪은 충격적인 사건들을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 상담 내용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상담 초반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초반엔 거의 반 이상을 울면서 통곡을 했다는 것뿐이다. 내용은 비슷하게 계속 반복 반복이었다. 물론 나는 정당한 비용을 내고 받는 상담이니까 전적으로 허용되고는 있다. 다시 말해 돈을 지불하고 어두운 이야기를 반복해서 쏟아붓는 나는 괜찮고 내가 돈을 내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안 괜찮다. 문득 내가 참 많이 세련됐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의 나라면 이렇지 않았다.
- 에이. 친구가 사과했는데 그냥 받아줘 했을 것이고.
- 학원 수업은 맘에 드니까 갈등 상황을 니가 더 참아보라고 했을 것이고.
- 껄끄러웠던 아이가 누구냐는 원장님의 말에 불안하지만 궁금증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소상히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불쾌한 상황에 처한 나 자신을 기꺼이 끄집어내는 힘도 생겼고 얼렁뚱땅 등록을 요구하는 상대에게 여유롭게 웃으며 응.. 아냐... 그건 내 맘이야.... 이렇게 거절할 수 있는 힘도 생겼다.
오랜 상담 끝. 시간과 비용을 들인 끝. 어쩌면 배부르고 등 따시니까 호강에 겨운 짓을 했나 싶은 순간도 종종 있었지만. 합법적으로 지지받는 남 뒷담화 같은 내 말에 조금 찔리기도 했지만.
분명히 내가 성장했다. 레벨테스트. 성공적으로 통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