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사투리가 구수한 -00 0대-를 어제 몰아서 봤다. 처음엔 사투리가 좋아 사투리를 들으려고 보다가 이내 마음이 좀 불편해졌다. 최근 1,2년 새 생긴 트라우마 때문인 것 같다. 공부는 하나도 안되고 있지만 오늘까지 안 쓰면 날아가는 시간 3시간이 아까워서 스터디카페에 그저 앉아있는 마음이었다. 드라마 자체는 매우 훌륭해서 주변에 권하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마음이 불편했던 순간은,
주인공이 갑자기 이성을 잃고 친구를 공격하던 순간이었다. 그 인과가 너무 기막히게 표현되어 있고 감정이 이입되어 안타까웠다. 지금의 내 마음이 거기서 보였다.
착하게 살다 조심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누가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도덕적 기준을 높이고 수행하듯 사는 사람들이 보인다. 법을 잘 지키고 설사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정석대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믿으며 누가 준다고 해도 영 찜찜해한다. 행여 누가 들을세라 험담도 잘 안 하고 심지어 남이 험담을 하면 너 그러면 안 된다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오늘 하루도 나는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고급스럽게 살아낸 것 같아 흐뭇한 기분도 느껴진다. 나도 그랬다. 깎아주면 감사히 받되 감히 먼저 청하지는 않는 자세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 이면엔 이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으니 나에게 그에 상응하는 복이 돌아올 것이다. 내가 죄를 짓지 않았으니 나에게는 참담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결과는 누구나 알듯이,
인생은 그렇게 개개인의 생각과 삶에 크게 관심이 없는 듯하다.
나쁜 일은 마치 제비 뽑기처럼 벌어졌고 오히려 그 뒤에 어떤 자원으로 어떻게 대처했는가가 그 나쁜 일의 농도를 결정할 뿐이었다. 억울하다면 억울했다. 매우 아주 많이...
나는 길거리에 껌 한번 뱉지 않고 고분고분 살았지만 인생은 폭탄을 내게 던지고는 또 다른 폭탄을 던지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 진지하게 청탁이라도 해볼걸.... 어디 어디 사는 누구누구에게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는 피해를 입었고 내장이 녹듯 괴로웠고 나의 대처는 현명하지 못했던 것 같다. 결과가 매우 좋지 않았으니 최선을 다한 것과 별개로 현명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새로이 눈을 뜨게 되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는 악인들의 논리가 통하는 이 세계라니!!!
길 가는 아무나 붙잡고 이러이러한데 이것이 말이 되오? 묻고 싶었다. 여기저기 하소연을 하면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하시었소? 그런 무뢰배들이 어디 있단 말이오? 참으로 당신이 딱하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애잔한 위로는 곧 수치심으로 다가왔다. 나의 치부를 드러냈으니 내 밑천이 바닥난 기분이었다. 어쩌면 저들은 나에게 닥친 불행으로 오늘밤 침대에 누워 이불을 야무지게 덮으며 속삭이듯 말할지 몰라. "에구. 안 됐지. 나는 절대 그럴 일이 없지만 그 사람 딱하네. 잘 좀 하지. 에유."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를 갈고 숨이 거칠어진다. 나도 저들과 같아지리라. 악인이 되리라.
무심히 넘어가던 일도 까칠하게 따지기 시작하고 때론 거짓말도 슬쩍해본다.
뭐 어때! 이 정도는... 나는 더한 거짓말에도 속았단 말이야! 내가 호구야?!!
하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곧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물론 이 단계를 밟고 더 이상 착하지 않은 상태로 나아가는 이들도 많다. 변절자가 더욱 고약해지는 것은 뒤돌아볼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뒤돌아본 세상은 그동안 초라하게 짜부라진 본인의 뒷그림자만 남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 단계에서 더 현명해지는 이들도 있다.
한순간 악인이 되려 했지만 결국 그 악이란 것도 저들의 입장에선 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누구나 상황 속에 자신을 위해 최선의 이익을 구하고 선택을 할 뿐 나 역시 그들의 선과 악을 판결할 권리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물러서면 상대가 내 목을 비틀어버리는 순간에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 하는 질문이 생겨버린다.
초인적인 사고력으로 나를 희생해 상대를 배불리 먹이더라도 그것이 선이라면 그 길을 택하겠다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사람은 어디까지나 동물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현명한 이들은 선과 악 대신 상황과 조건이 있을 뿐이며 사람들은 적절히 취사선택하는 생명체라는 점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자신 역시 상황과 조건을 더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본인을 지키고 상대를 불필요하게 도발하지 않는 어떤 접점을 찾아내게 된다.
그래서 나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피해자라고 억울하다고 피를 토하듯 분노했지만 내 천성과 낮은 자존감은 어느덧 악인의 입장을 헤아리고 있었다. 내 도덕적 기준을 상대방에게 들이대며 의아해했지만 상대방의 기준에선 내가 성가신 존재였을 뿐이다. 모든 것을 쏟아붓고 노력했지만 나는 처참히 패했고 악인의 승리를 경멸했다. 이것이 악인을 이기지 못한 나의 무능에 대한 연민은 아닐까 반성하고 있다.
결국 또다시 죄책감과 자괴감의 자리로 돌아와 한순간이라도 악인의 흉내를 내었던 나의 모습을 혐오하고 엄정한 세상 앞에 내 본질을 잠깐이라도 오염시킨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기로 했으면 끝까지 져야 한다. 칼을 상대하려면 더 크고 강한 칼이 되어야 한다. 애초에 나의 그릇이 그럴 수 없음을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벼르고 별렀지만 나의 칼은 물렁했고 어설픈 모습으로 오히려 대중의 빈축만 사고 말았다. 그 용기로 나 자신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재빨리 다른 길을 모색했어야 했다.
상처는 아물어야 아프지 않다. 흉터는 어차피 남는다. 더 이상 상처 입지 않도록 조심하고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기보다 훌쩍 떠나는 용기도 필요했다. 상처뿐인 영광보다는 흉터 남은 새로운 성장을 택해야 했다. 지옥은 견디기보다 벗어나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늦게나마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