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다는 그 말.
벌써 새벽 4시다.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있다. 다시 예전처럼 불면이 시작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번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난. 잠 잘 자고 잘 먹는 인생을 살겠다.
조금 생뚱맞은 모임이긴 했다. 우리 여자 셋의 공통점은 별로 없어 보였다. 연령대도 제각각이었지만 인생을 좀 살아본 여자들답게 그럭저럭 서로에게 맞춰주고 있었다. 다른 환경의 여자들인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바라보며 삶의 작은 힌트를 얻으려는 마음도 있겠지 싶었다. 결국 나는 엄마 이야기를 또 하고야 말았다. 변명을 하자면. 그런 자리, 그런 분위기였다고 생각한다.
털어내고 털어내다가 이제 쪼끔 남은 먼지라고 생각했다. 한 명은 입을 약간 벌리고 충격을 받은 듯했고 나머지 한 명은 차분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리고 그 차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 것 같다.
"난 그 말을 전부 다 믿지는 않아요."
전부 다 믿지는 않는다라니, 당황스러웠다. 난 주욱 펼쳐놓은 옥장판을 바라보며 주섬주섬 챙겨드는 장사꾼이 된 듯했다. 난 뭘 팔았지? 그녀들을 감정쓰레기통으로 생각한 건 절대 아니었다. 이 모임 자체도 내가 피했기 때문이다. 만나자, 만나자 소리에 다음에, 다음에.라고 대답하며 피한 건 나였다. 사실 이번 모임도 앞으로는 못 나온다고.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하리라 굳은 결심을 했기 때문에 내가 밥을 샀다. 마지막으로 밥을 사고 작별을 하면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고급 식사는 아니었지만.)
난 내 말을 전부 믿지는 않는다는 평에 반응을 하지 않고 웃으며 화제를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그리고 모임이 끝날 때까지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그녀들에게 과장되게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그렇지. 못 믿지 못 믿어.
출산한 딸을 위해 자른 미역 한 봉지 사지 않은 엄마, 출산 후 백일까지 우유 한 팩 마시지 못한 것. 퇴근하는 남동생에게 우유 하나만 사다 달라고 부탁해서 마침내 딱 한번. 그 우유 500ml를 허겁지겁 마셨던 것. 매일 오후 2시쯤에 라면 하나 끓여 밥 말아 김치랑 먹던 유일한 하루 한 끼. 내가 부른 산후도우미가 처음으로 아기 목욕을 도와주며 식사를 차려줬던 것. 산모 있는 집에 아무것도 반찬이 없다며 산후도우미가 내게 카드를 받아 마트를 갔었다. 참기름, 두부, 시금치 등등을 사 와서 밥상을 차려주었고 엄마는 내내 그걸 째려봤다.
산후도우미가 나에게 다가와 "친정엄마는 아니죠? 애기엄마. 뭐든 간에 얼른 이 집에서 도망쳐요. 다른데 갈데없어요?"라고 속삭였다. 매일 오기로 했지만 엄마는 내 집에 다른 사람이 드나드는 것이 싫다며 오지 못하게 했다. 남편은 5시간 거리에 있었고 내 집은 보일러 문제로 12월에 난 신생아와 갈 곳이 없었다.
다른 곳으로 도망치라는 산후도우미의 말에 내 마음이 위안받았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언니의 산후조리를 어떻게 해줬는지 다 지켜본 나로서는 매우 괴로웠기 때문이다. 다른 집을 얻어 거기서 산후조리를 하겠다는 나를 억지로 친정집으로 데려온 건 엄마였다.
난 그 말을 전부 다 믿지는 않아요.
그렇지 못 믿지 못 믿어. 나조차도 믿지 못했는데 평범한 사람들은 짐작도 못하지.
난 그녀에게 감사한다. 난 이제 절대 사람에게 나의 고통과 상처를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나를 연민으로 바라보던 과거에서 벗어나 이제 곱씹을 상처를 거부하기로 했다. 애초에 나를 힘들게 하고 수발들게 하는 조짐이 보이면 그 관계를 딱 잘라내기 시작했다.
돌려 말하거나 흐지부지하지도 않고 있다. 정당한 내 몫을 주지도 않고 오히려 내게 귀한 대접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가차 없이 번호를 차단하고 대화방은 나와버렸다. 다른 사람을 통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에는 천연덕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요만큼의 빌미도 주지 않고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연결된 모임도 나가지 않고 원천차단했다. 불안하지 않았다. 난 그 사람 없이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인생을 산다는 건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고통을 즐기지도 자랑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납득이 가는, 그런 심심한 인생을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