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흔적을 남긴다.
주로 한적한 곳에 위치할 경우가 많다. 버스보다는 자가용을 타고 가는 것이 훨씬 편하기는 하다.
박물관말이다.
나는 특히 국립공주박물관을 좋아한다.
평일 낮 한산한 시간에 도착해 정문을 통과하면 또다른 시간이 시작된다.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큼직큼직 눈에 걸리는 것이 없는 넓은 길을 나 혼자 걷고 있다.
마치 거대한 성에 갇혀 살던 공주가 어제 찾아온 왕자를 따라 떠난 듯한 이 분위기를 나 혼자 만끽하고 있다.
아직 떠난 이가 실감나지 않는다는 듯 이방인의 방문에 떨떠름한 표정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인사를 할 필요도 없고 할 일도 없다.
잠깐 입을 헤 벌리고 멍하니 서 있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
이곳 저곳 공주가 빠져나간 성을 나 혼자 돌아다닌다. 속도도 내 마음, 방향도 내 마음이다.
주인 없는 공간은 무방비로 자신의 구석구석을 내보인다. 아니 어쩌면 이 나그네가 다시 자신의 주인이 되어 주길 바라는 것도 같다.
유리벽 안에 이것저것 진열이 되어 있다.
아름다운 왕관도 보이고 자잘한 장신구들도 보인다.
높이 매달린 옷이 있고 진열장 바닥에 놓인 신발 따위가 있다.
낡고 닳아빠진 그것들은 온전한 채로, 또는 온전치 못한 채로 들어차 있다. 여기서 더 헤지지는 않겠다는 듯이 다소곳하게 머물러 있다.
하나 하나 천천히 보아주고 있다. 작은 장신구의 긁히고 깨진 흠집 하나까지 자세히 들여다 본다.
흠집이 생긴 이유를 나혼자 추리해보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진열장들 사이 빈 공간이 보인다. 약간 어둡고 서늘한 그 구석에 간이 침대를 가져다 놓고 싶다.
편안하게 앉거나 누워보고 싶다.
아무도 말 걸지 않고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공간이 주는 해방감이 느껴진다.
여기 물건들은 서로 비교하지 않는다. 각자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채 그저 진열되어 있을 뿐이다.
나 역시 차분히 진열되어진다.
금으로 만든 왕관이든, 작은 돌조각이든 우열을 가리지 않고 오랜 세월을 버텨온 자신들을 담담히 드러내고 있다. 치열했던 쓰임의 시대를 떠나 이제는 모두 조용히 웃고 있다.
더 출세하고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어울려야 행복한 줄 알았던 나에게 무슨 말이 하고싶은 것일까.
세월이 오래 지나 나에게 남는 것은 비싸고 귀한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떤 이유로든 우연히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 준다.
시간이 흘러 내 손안에 쥐게 되는 것은 너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장신구의 자잘한 흠집이 알려준다.
너는 어쩌면 이걸 모르고 있냐고 말한다.
오히려 남기지 못하는 것을 놓치지 말라고 속삭여준다.
남길 수 없는 것들을 더욱 사랑하라고 말해준다.
네가 남기는 것들은 그 남겨지지 못한 것들을 오로지 추억하기 위한 도구일뿐이라고 안타까워한다.
남들이 뭘하고 있는지, 남들이 뭘 소유하는지 끊임없이 눈치보며 비슷해지려고 애쓴 세월을 반추한다.
갖고 싶었지만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포기해버린 사랑을 기억해낸다.
해보고 싶었지만 남들의 평가에 밀려 포기해버린 일이 아쉬워진다.
남들의 진열장을 바라보며 나의 진열장을 채우려고 했던 욕심들이 생각난다. 진열장에 걸맞는 옷과 신발을 고르고 황금으로 왕관을 만들며 청춘을 바쳤다. 누구 못지 않게 진열장을 채우고 채워 멋진 박물관을 만들겠다며 자만했던 내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가난하고 옹색해지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손을 꼭 잡고 원하던 그 길을 또박또박 걸어갔더라면.
그래서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나의 남겨진 것들이 저 유리진열장 안에 놓여진다면.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 놓여있더라도 태산같이 뿌듯하고 가슴이 벅차올랐을 것이다.
깨달음의 끝은 피곤해진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게임을 중간에 이미 져버린 느낌이 들어서일까.
저 어두운 구석쯤에 간이 침대를 가져다 놓고 싶다. 거기 누워 조용하고 인적 없는 냄새를 맡으며 잠시 눈을 붙이고 싶었다. 잠이 솔솔 올 것만 같았다.
그대로 이 성의 새로운 공주가 되어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이 성 안에 박제가 되어버릴 순 없다. 일어나 간이 침대를 치우고 그 자리에 새로 진열장을 하나 놓아볼까.
텅 비어 있는 진열장을 보고 성을 빠져나가 뭐라도 건져와야지. 이제라도 원하는 것을 해봐야지.
남들이 뭐라고 간섭하든, 이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고 싶었던 것을 해봐야지.
100년 뒤든 200년 뒤든 내가 남기는 것은 내가 원했던 것이기를. 가장 나다운 것이기를 원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너에게 소중한 것을 남기라고 가르쳐주는 박물관을 나오면서 뒤돌아본다.
저곳에 아직 내가 채울 텅 빈 진열장이 하나 있다.
유사품을 집어 넣을 순 없다. 나만이 만들 수 있고, 지닐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찾고 싶다.
금관이든, 작은 돌멩이든 상관없이 후회없는 것을 들고 오라고 박물관이 용기를 준다.
타자의 삶을 복제하지 말라는 그 말을 듣고 싶어서 박물관을 찾아가고 또 찾아간다.
가장 나다운 것을 원하는 그곳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