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떠나보는 인생 네비게이션
인문학을 선행학습하고 싶어
왜 인문학인가.
--신에게서 독립한 인간. 성찰을 시작하다.--
우연히 들어본 인문학 강의는 내겐 무거운 주제였다.
하기야 요샌 어딜 가든 인문학 이야기는 흔해 빠진 유행처럼 되버려서 새삼스럽지는 않다.
호기롭게 고급스런 수다거리로 삼는 이들도 많다. 뭔가 거창하고 심오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지만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중년의 그는 결혼을 했고 자식을 두었다.
남들보다 조금 이른 나이에 시작한 직장생활은 익숙하기 그지없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출근을 하고 남들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을 한다.
퇴근후엔 저녁을 먹고 자신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곧 운동동호회에 나간다.
두명 혹은 네 명이 팀을 이뤄 시합을 하는 동호회에 출근도장을 찍듯이 꼬박 나가는 것이다.
매일 저녁 밤 11시에서 때론 밤 12시를 넘겨 흠뻑 땀에 젖은 채로 집으로 돌아온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또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숙면을 취하고 아침이 되면 또다시 출근을 한다.
그의 주말도 따라가 보자.
토요일 아침에 차려주는 밥을 먹고 한두시간 뒤에 또다시 운동 동호회에 나간다.
평일 저녁에 나오지 못하는 멤버를 만나기도 하고 그렇게 반갑게 운동을 한다.
점심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잠시 몇 시간 낮잠을 자고 쉰 뒤에 저녁이 되면 또다시 운동을 나간다. 그리고 어김없이 밤 늦게야 들어온다.
일요일은 토요일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가끔 장을 보러 아내를 데리고 마트까지 운전을 해주기도 한다.
이 남자는 매일 규칙적으로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있다. 3년 뒤 5년 뒤 가정의 대소사를 고민할 필요는 없으며 아이들은 시간에 따라 부쩍 잘 자라주고 있다. 재작년과 작년도 비슷했으며 작년과 올해도 비슷하다.
크게 밤잠을 설칠 사건 따윈 없다.
그의 인생에 이벤트라면 동호회의 시합에 누구와 파트너가 되어 이길지 질지 전략을 짜보는 것 정도이다.
그럼 이번엔 어떤 한 여자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녀 역시 결혼을 했으며 자녀를 두고 있다.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 둔 그녀는 자녀를 양육하며 집안일을 하기 시작한다.
세상이 좋아져 세탁기 청소기 등등 전자 제품이 많아 육체적으로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루 종일 집안에서 반복되는 일을 하면서 그녀는 점점 단순노동에 익숙해졌다.
복잡한 서류다발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동료에게 칭찬을 들으며 우쭐하던 기분은 더 이상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 기꺼이 빨래를 하고 식사를 준비한다.
그녀는 남편과 가정의 미래에 대해 협의하고 싶었다. 자녀교육에 대한 합의가 필요했으며 때로는 낯선 곳으로 휴가 계획을 세우고 싶었다. 비슷한 일상이지만 그 속에서 작은 실마리를 잡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을 하고 감정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은 성실한 손님으로 집을 방문해 식사를 하고 곧 자신의 취미를 위해 분리되었다. 남편은 아이교육은 엄마의 몫으로 남겼고 궁금해 하지 않아했다.
그녀는 점점 세탁기와 청소기 어디쯤에 쪼그리고 앉으면 자신도 완전한 가전제품으로 변하지나 않을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는 신 중심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으로 그 시선이 이동한 황금기이다.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대해 무한한 애정과 추앙을 멈추고 자신들같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자각이 폭발했던 것이다.
왜일까?
인간은 바로 그들의 니즈(needs)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들 하나하나 제각각의 니즈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신을 향해 맹목적으로 축복을 허락 받기 원했으나 당연히 모든 인간은 그 축복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캐릭터가 고정된 신을 알아가는 것보다 더
다양하고 더 함축적인 인간들의 캐릭터가 훨씬 재밌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많은 이들에게 신이란 그저 가게 안의 피규어 쯤으로 여겨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번영에 대해 몰두하고 직접 구원하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앞의 두 남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인간이란 존재가 이토록 위태롭고 가소롭다. 그들은 자신의 니즈를 영리하게 알아챌 필요가 있다.
남자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만을 채우고 있다. 오로지 본인을 위한 활동에 몰두하면서 가족은 악세사리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가족과 감정을 교류하지도 않으며 미래를 설계하지도 않는다. 남들이 대부분 꾸리는 가정을 자신도 껍데기로 꾸며 놓고 전혀 돌보지 않고 있다.
사실 그 남자는 자신이 할 일은 모두 자신의 월급이 대신하고 있다며 사뭇 당당하기까지 하다
여자는 자신의 니즈에 걸맞는 상대를 고르지 못했다. 이것은 결국 본인의 니즈 파악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욕망을 구원시킬 방법을 찾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인문학은 현대인에게 거의 유일한 처방전이다.
갓 스무살에서 서른살 많게는 마흔살 사이에 인생의 가장 큰 결정을 연달아 하게 되는 인간의 일생을 볼 때 경험적은 인간이 현명한 선택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인문학은 얼핏 나와 너무 먼 철학적인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넓고 크게 신에게서 도망친 인간들의 수많은 운명과 선택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그 속에서 교훈을 얻어 자신의 니즈를 제대로 바라볼 힘을 주려고 한다.
결국 인간인 내가 행복하게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스스로 잘 알아내야 하며 나의 니즈는 무엇인가를 곱씹어야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든가.
나의 눈에는 너의 니즈를 파악하라는 말로 보인다.
그 대단한 신에게서 독립한 더 대단한 인간인 나의 니즈를 충족시킬 방법을 꾸준히 찾을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최소한의 도덕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도 깨달을 수 있다.
자각없이 관성대로 살아가다 그 공허와 무기력에 갇혀 그제야 자신의 니즈를 알아챈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되돌릴수 없는 수많은 선택들은 또 얼마나 자신을 구속할 것인가.
남자와 여자가 다행히 자아성찰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의 인생은 이전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적어도 다른 이를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가족을 등한시하고 본인의 이기적인 욕구만 채워가며 아내를 고통 속에 살게 하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미워하며 분노와 우울에 빠져 소중한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안타까운 그 가정의 아이들은 부모 사이에서 희생양이 되어 또다시 부모를 답습하게 된다.
나 정도면 잘 살고 있다라고 자만하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조율하며 건강히 살 수 있는 길을 버린다.
상대를 착취하고 이기적으로 살며 만족스러워하지만 결국 그 댓가는 불행으로 자신에게 되돌아 올 것이란 것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자신의 건전한 니즈를 격려하고 존중하지 못하고 남에게 행복을 의존하려하는 나약한 선택은 우울과 분노로 자신을 파괴할 것이며 가장 사랑하는 자녀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문학은 그렇게 무기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