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3일차 오늘의 일기
전 직장 사람들과 대부도로 떠났다. 1박 2일, 총 일곱 명. 그중 맏형인 부장님은 아이 둘의 손을 잡고 나타났고, 1박 2일을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얼굴만 비추러 온 ‘의리의 멤버’도 두 분이나 있었다. 대부도가 인천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라지만, 오직 사람을 보러 그 길을 달려온 마음들이 새삼 끈끈하게 느껴졌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과장님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무알콜 맥주에 고기만 드시곤 곧장 집으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부어라, 마셔라" 하며 뒷수습은 내일의 나에게 미뤘을 텐데, 이제 그런 무모함은 없다. 우리는 모두 나이를 먹었고, 저마다 짊어진 사회적 책임의 무게를 아는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그 무리에 섞여 있으니 나 또한 제법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한때는 한 지붕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전장에 서 있다. 여전히 회사에 남은 세 명이 씁쓸한 농담을 던졌다. "이야, 이제 남은 사람보다 떠난 사람이 더 많네."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던 우리는, 잠시 그 치열함을 내려놓고 간단한 주전부리와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며 추억 여행을 떠났다.
이번 여행이 유난히 좋았던 건,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퍼포먼스 마케팅 성과와 광고주 보고에 시달려야 했지만, 퇴사 3일 차인 지금 내 가방엔 노트북이 없다. 술잔을 기울이다 말고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광고주의 메시지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 달콤한 해방감 덕분이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일에 대한 압박이 사라지자, 오히려 건강한 생산적인 대화가 피어올랐다. 파티룸을 운영하며 태블릿 케이스도 판매하신다는 분과 자연스레 마주 앉았다. 나 역시 파티룸 창업을 꿈꾸고 있었기에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던졌고, 그분은 내게 마케팅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 억지로 해야 하는 '보고'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을 건넨다는 사실이 묘하게 기뻤다.
우리의 대화는 매캐한 연기가 가득한 바비큐장에서 밤늦도록 이어졌다.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숯불 연기가 공간을 가득 메워 수시로 창문을 열어야 했고, 그때마다 들이닥치는 찬 바람에 덜덜 떨어야 했다. 하지만 그 추위와 연기조차, 훗날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것임을 나는 직감하고 있었다.(2차는 방 안에서 따뜻하게 먹었다.)
짧은 잠을 청하고 맞이한 일요일 아침. 교회에 가야 해서 서둘러 씻고 나왔는데 아뿔싸, 펜션에 헤어 드라이기가 없었다. 수건으로 대충 털고 차에 타 거울을 보니 영락없는 피난민 꼴이다. 반곱슬 머리에 드라이기는 필수거늘. 교회 주차장에 도착하니 소그룹 리더 회의까지 40분이 남았다. 숙취가 스멀스멀 올라와 차에서 쪽잠을 잤다. 잠깐의 휴식 덕에 컨디션은 조금 나아졌지만, 교회에 들어서자 청년부 누나가 걱정스레 말했다. "너 되게 힘들어 보인다." 실제로 힘들기도 했지만, 제멋대로 뻗친 머리카락이 내 피로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연출해주었으리라.
결국 회의와 예배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참여했다. 간만에 누린 자유에 내 체력이 굴복해버린 탓이다. 확실히 예전 같은 회복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꾸준한 관리만이 살길이다. 다행히 청년부 예배가 끝날 즈음엔 정신이 돌아왔다. 소그룹 모임에서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답변하기 어려워하는 친구들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물꼬를 트는 역할, 다행히 그 정도의 여유는 남아 있었다. 평소보다 길어진 모임 시간에도 다들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말해주어 안도했다. 이래서 경험이 필요하고, 생각을 정리해 말로 내뱉는 연습이 필요하다.
읽고, 쓰고, 말하는 연습. 나는 이것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이 고단한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일기를 쓴다. 어떤 형식이든 글로 일상을 남기는 건 나를 표현하는 훈련이자, 필연적으로 찾아올 망각에 대한 저항 운동이다. 내가 경험한 좋은 기억들을 다정하게 붙잡아두는 일. 이 기록들이 훗날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지탱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내가 믿는 기록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