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체되지 않기로 했다

퇴사 4일 차, 오늘의 일기

by 김시온

아침 알람 소리가 더 이상 싫게 느껴지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미간을 찌푸리며 알람을 삭제하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껐을 텐데, 오늘은 기분 좋게 끄고 다시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전날 밤만 해도 걱정이 앞섰다. 1박 2일 여행의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교회에서의 일정까지 소화한 탓에 무척이나 힘들었는데 차도 없이 대중교통으로 추위를 뚫고 귀가했으니, 오늘 아침 내 몸은 천근만근일 것이 뻔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몸은 가뿐했다. 아마도 나에게 허락된 이 자유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누리겠다는 의지가 몸이 가뿐하다는 생각을 이긴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가 출근 전에 아침을 먹자며 나를 깨우셨다. 더 자고 싶은 유혹이 강렬했지만, 벌떡 일어났다. 평소 함께 식사할 시간이 부족했던 불효자가 뒤늦게 부리는 효심이다. 밥을 뚝딱 해치우고 효도의 연장선으로 어머니를 직장까지 모셔다 드렸다. 시간이 많다는 건, 이런 사소한 다정함을 베풀 여유가 생긴다는 뜻이다.

집으로 돌아와 넘쳐나는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다 ‘청소’를 택했다. 미뤄뒀던 패딩을 세탁기에 넣고, 방 한구석에 방치된 쇼핑백을 열었다. 퇴사할 때 가져온 짐들이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가방과 짐들을 정리하고 나니, 마치 지난 회사의 흔적을 지워내는 듯한 개운함이 밀려왔다. 기세를 몰아 욕실 청소까지 감행했다. 유리 세정제를 뿌려 거울을 닦는데, 이게 웬걸. 청소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물을 뿌리고 닦아내길 수차례, 30분 뒤에 가보면 세제 얼룩이 그대로 남아 있어 같은 짓을 두세 번 반복해야 했다. 청소를 마치니 어느덧 점심시간. 온몸에 피로가 몰려왔다. 세상의 모든 주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점심을 먹고 거실 소파에 누워 가장 편한 각도를 잡았다. 스피커에선 느릿한 재즈가 흐르고, 폰으로 밀리의 서재에서 '다크 심리학'이라는 책을 봤다. 남은 분량은 10페이지 남짓. 매일 출근할 때 봤었는데 어느덧 끝이 보였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쯤 스르르 잠이 쏟아졌다.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눈을 뜨니 오후 2시 50분. 청소하고, 밥 먹고, 책 읽다 낮잠 자는 삶. 오랜 기간 일을 쉬면 이 감각도 무뎌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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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함을 털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사업계획서를 열어 파티룸 대여 시간 관련 상품을 구성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채워 넣는 것이 목표다. 누군가는 "아직 배가 덜 고픈 것 아니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꾸준함도 연습이다. 2월 말까지만 완성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조급함 대신 성실함을 채워 넣는다. 그때, 여행을 같이 갔던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인이 파티룸을 매각한다는데 관심 있으면 보러 가라는 제안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꾸며진 매물을 보는 건 처음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가기 전, 제미나이(Gemini)를 켰다. 체크해야 할 리스트를 정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AI가 없었다면 현장에 가서 우왕좌왕하거나, 돌아오는 길에 "아, 그거 물어볼걸" 하며 후회했을 것이다. 사업을 준비하며 AI의 도움을 톡톡히 보고 있다. 기획안 구성부터 워드에서 내가 구현하고 싶은 기능까지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기까지, 내게는 든든한 비서나 다름없다.


일론 머스크는 10년, 20년 뒤면 노동은 선택사항이 될 것이라 했다. AI가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줄 테니까. 이미 그 변화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누구보다 치열하게 이 도구를 써봐야 한다. 회사를 다니든 사업을 하든, 언제 내 일자리가 사라질지 모르는 시대다. 대체되지 않으려면 나만의 무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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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3년 전부터 급격히 변했다. 읽지 않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콘텐츠를 만들며 '생산자'의 삶을 연습해 왔다.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지금, 단순히 소비자로 남아서는 생존할 수 없다. 파도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 위에 올라타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나오는 결과물이 아니다. AI에게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 그 결과물을 어떻게 해석하고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 결국 생각하는 힘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어휘력이 본질이다.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AI도 지배한다.

변화의 속도는 점점 빨라질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하기보다,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가 그 변화의 흐름에 함께 탑승해 있기를 바란다. 닦아도 닦아도 얼룩이 남는 거울을 보며 땀 흘리던 '아날로그의 나'와, AI에게 질문을 던지며 미래를 설계하는 '디지털의 나'. 그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대체 불가능한 어른이 되는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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