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9일 차, 오늘의 일기
일기란 으레 그날의 기록이라지만, 오늘은 어제저녁의 여운을 이곳에 끌어와야겠다. 잠들기 전 보았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때문이다. 눈을 뜨자마자 습관처럼 평점과 블로그 후기를 뒤적였다. 내가 경험한 감동을 타인은 어떤 언어로 표현했는지, 나의 시선과 어떻게 겹치고 또 다른지 확인하고 싶어서다. 내가 미처 닿지 못한 사유의 깊이를 발견하고 감탄하는 과정까지가 내겐 콘텐츠를 온전히 소화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12살, 서로의 첫사랑이었던 해성과 나영의 이야기를 그린다. 나영의 이민으로 끊어졌던 인연은 12년 뒤 페이스북을 통해 닿지만, 서울에 가고 싶은 자신과 뉴욕에서 성공하고 싶은 현실 사이에서 나영은 혼란을 느끼고 다시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다시 12년, 총 24년의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드디어 뉴욕에서 마주한다. 해성은 옛 연인과 헤어지는 중이었고, 나영은 '노라'라는 이름으로 백인 남편과 결혼한 후였다.
가장 인상적인 건 바에서의 장면이었다. 나영의 남편이 옆에 앉아 있음에도, 해성과 나영은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로 "만약에"라는 가정을 쏟아낸다. "우리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불륜이 아니었다. 24년 동안 묵혀둔 감정의 실체를 확인하는 과정이자, 끝내 맺어지지 못한 인연에 대한 예우였다. 나영의 남편 역시 그녀의 히스토리를 알기에, 그들 사이의 '끊어짐'을 막지 않고 묵묵히 지켜본다.
해성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돌아온 나영은 남편의 품에 안겨 오열한다. 그 눈물은 아쉬움보다는 '해갈'에 가까워 보였다. 과거의 미련을 남김없이 쏟아내고, 비로소 현재의 남편에게 온전히 안착하는 의식. 그것은 "고생했다"며 등을 토닥이는 남편에 대한 고마움이자, 지나간 시절을 완전히 떠나보내는 후련함이었으리라.
영화는 내내 '인연'을 말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시절인연'을 떠올렸다. 아무리 마음이 깊어도, 서로가 놓인 시간과 환경이라는 물리적 계절이 맞지 않으면 같은 하늘 아래 있어도 닿을 수 없다.
나의 지난날을 돌아본다. 내 곁을 스쳐 간 친구들, 그리고 연인들. 그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때로는 추억 속에 아름답게 미화되기도 하고, 때로는 미안함으로 남아 있는 얼굴들. 이제는 만날 수도 없고, 만나서도 안 되며, 굳이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들이 각자의 계절에서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어쩌면 그들 중 누군가도 나를 떠올리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더 잘 살기로 했다. 과거에 머무는 대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내가 바라는 미래를 향해 부지런히 발을 내딛는다. 이것은 나를 스쳐 간 모든 인연에 대한 가장 정중한 작별 인사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고, 나는 다가올 만남을 준비한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나의 다음 계절에 찾아올 인연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