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반품 박스에서 마주친 인간의 추악함

퇴사 69일 차, 오늘의 일기

by 김시온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파티룸 창업 전까지 쿠팡 같은 단기 아르바이트는 내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줄줄이 이어지는 결혼식 축의금 폭격 앞에 장사 없듯, 통장 잔고가 비어가는 속도를 감당하기 위해 결국 쿠팡의 보은을 입었다.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기에 재미있고, 그 덕분에 돈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뼈아프게 깨닫는다.


어제 아침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8시 업무 시작인데 눈을 뜨니 7시 30분. 정신없이 차를 몰아 7시 57분에 도착했지만, 이번엔 신분증이 발목을 잡았다. 갤러리를 샅샅이 뒤져 겨우 신분증 사본을 찾아봤지만 사진으로는 안되고 모바일 신분증이 필요하다고 해서 인포 직원의 도움으로 8시 17분에 겨우 교육장에 들어섰다.

교육장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40~50대 아버님, 어머님들부터 20대 초반 친구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그 낯선 풍경 속에서 문득 못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일해야 하는 내 처지가 싫다'는 오만함이었다. 남들도 나를 저들과 같은 시선으로 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섞인 비겁한 마음이었다. 나름 모태신앙에 사람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읽어왔지만, 내 심연에 숨어있던 추악한 민낯을 마주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이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집중해 보겠노라 무장하며 검수대로 향했다.

운 좋게 배정받은 곳은 '반품 검수' 파트였다. 처음이라 기준이 모호해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지만, 점심을 먹고 난 뒤부터는 제법 감이 잡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현대인의 일그러진 소비 유형을 목격했다. 내가 마주한 잊을 수 없는 '빌런' 5인방은 이랬다.


첫 번째, '때 탄 검은색 맨투맨':

목 주변에 때가 선명한데도 뻔뻔하게 반품을 보낸 사람. 대체 무슨 생각일까.


두 번째, '포카칩 20봉지':

24개들이 랜덤 박스를 사서 4개만 쏙 빼먹고 나머지를 반품한 사람. 악용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더니 눈앞에서 보니 경이롭기까지 했다.


세 번째, '블랙리스트':

바코드를 찍자마자 '반복 반품 고객이니 정밀 검수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내가 발견한 것만 3명이었으니, 전체 규모는 상상조차 안 간다.


네 번째, '비운의 총무':

주소를 잘못 적어 햇반 72개를 반품시킨 사람. 당황해하고 있을 어느 단체 총무의 표정이 상상되어 남 일 같지 않았다. 물론 상상이다. 실제로 총무인지 일반 자취생인지는 모른다. 그냥 그런 상상을 하니까 시간 금방 갔다.


다섯 번째, '3주 수영인':

물 얼룩이 그대로 남은 물안경. 수영을 딱 3주 하고 접었나 보다 싶은 그 흔적에 실소가 터졌다.

이것도 그냥 추측이다. 반품이 30일 기준이니까 내 나름대로의 추측을 해봤다.




똑똑하게 소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제 마주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악하게 소비하고, 시스템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매일 끝도 없이 쌓이는 반품 박스 더미를 보며 자영업자들이 돈을 벌기가 얼마나 험난한지 다시금 체감했다. 훗날 파티룸 호스트로서 마주할지도 모를 리스크를 예습한 셈이니, 쿠팡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쏠쏠한 자산이 되었다.

일단 이번 달 축의금과 카드값을 메우기 위해 주 3회는 쿠팡으로 출근할 예정이다. 내일도, 아마 금요일도 나는 검수대 앞에 서 있을 것이다. 5월 말 임장을 돌고 파티룸을 오픈하기 전까지, 이 고달픈 현장은 나를 더 단단한 예비 창업자로 빚어줄 것이라 믿는다.

Gemini_Generated_Image_rh4hpxrh4hpxrh4h.png 일하는 모습을 찍을 수 없어서 AI로 생성해낸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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