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가을에 그냥 걸어보았다(1)

-[걷는 사람, 하정우] 느낌 있다.

by 한여름꿈


모두에게 무한의 시간을 주었던 2020년.

그 해 가을 두 번째로 사업장이 집합 금지 대상이 되었다. 처음 그 타격을 받았을 때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쉬자는 마음으로 불필요한 명랑함을 발휘했지만 밤에는 혼자 뒤집어져서 심란함을 달래야 했다. 두 번째 대상이 되었을 때는 알 수 없는 무력함이 찾아왔다. 그냥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쉬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 즐거운 법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던 나는 설상가상으로 체육관도 문을 닫는 바람에 속 시끄러운 내게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운동까지 못하게 되자 처음 며칠간 핑계 삼아 게으름을 피우던 여유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겨우 사나흘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도 이렇게 살다가는 하루라는 시간에 질식당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그냥 이 책 제목이 딱 생각났다. "걷는 인간, 하정우" 나중에 알고 보니 '걷는 인간'이 아니라 '걷는 사람'이었고 그걸 깨달은 후에는 왠지 걷는 인간이라는 단어가 사피엔스적인 느낌이 들어 혼자 민망해서 웃었다. 사람은 평소에 콩나물에 물을 주듯이 경험과 지식에 마구 노출되는 것이 이래서 중요한 거다. 그냥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걸어봐야겠다.'


그런데 걷는 게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걸으면 되는 건가? 아무 곳이나 다니면 되는 건가? 그래도 준비를 하고 운동복을 입어야 하나? 물통이나 수건을 챙겨야 하나? 걷는다면 얼마를 걷는 건가? 막상 걷기로 결심하고 나니 생각보다 모호했다. 그냥 걷자니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가 더해질까 염려도 되었다. 하다 하다 이젠 발악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면서 할 거면 경험자 이야기라도 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그런데 정말 이 책이 걷기에 대해 말해줄까? 워낙 책을 좋아하는 터라 어지간하면 내용이나 들어볼 심정으로 길을 나서기 전에 운전할 때 전화 거는 용도 외에는 쓰지 않는 이어폰을 챙겼다. 콩나물 꼬리를 똑 따서 만든 것 같은 이어폰을 고등학생들도 다 쓰는 판에 나는 아직도 링거 줄처럼 주렁주렁 휴대폰에 걸쳐진 이어폰을 사용한다. 유료 결제를 하지 않고 써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화면을 꺼버리면 영상이 중단되어 버리는 유튜브를 켠 후 조심스레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걷거나 움직이다 보면 최첨단 휴대폰의 민감한 인식이 화면을 이상한 곳으로 넘겨 버리기 일쑤다.

걷기 편한 운동화를 신고 화장은 하지 않고 선크림을 바르고 마스크를 썼다. 사실 화장을 제대로 해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반바지를 입고 호주머니에 책을 소개하는 유튜브 영성을 튼 휴대폰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리고 귀에 영양이라도 공급하듯 이어폰을 꼈다. 걷기에 대해 1,2분가량 블로그를 보면서 기왕이면 내 걸음을 걸음 수든 시간이든 측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서며 미리 인터넷에서 찾아본 Pacer앱을 켰다. 어떤 기능이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GPS를 켜자 내가 서 있는 아파트 현관문에서 빨간 점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점을 보자 갑자기 기분 좋은 에너지가 몸속에서 솟아나는 것 같았다. 어서 가자고 조르는 기분 좋은 재촉이 느껴졌다. 밖으로 나갔다. 가까운 상점에 볼 일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집 앞에 나와 건널목에서 달리기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주자처럼 서 있자니 묘한 느낌이었다. 아직까지는 걷는 것이 아주 무료할 거라 예상하면서 오디오에 의지해야겠다 생각했다. 너무나 듣기 좋은 목소리의 북튜버가 책의 일부를 조용히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고 나의 아픈 마음을 어떻게 털어놓아야 하는 건지 사람들의 위로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수많은 히트작을 성공시키고 재테크에도 성공한 연기파 배우의 고백이 그저 책을 흥미롭게 시작하기 위한 문구같이 느껴지지는 않아서 나는 이어폰을 야무지게 귀에 다시 고정시키며 듣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게도 그런 날이 있다. 눈을 떴을 때 온몸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지는 날. 그런 날은 마음도 울적해서 도로 눈을 감고 이불 속애서 꼼짝도 하고 싶지가 않다. 때로는 그런 날이 하루로 그치는 게 아니라 다음 날, 또 그다음 날로 하염없이 늘어지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집안에만 머물고 싶은 날. 집 밖이 왠지 낯설고 오직 내 방만이 안전하게 느껴지는 날들"


내가 원래 살던 곳은 동탄신도시라는 곳이었다. 무엇을 짓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하게 다져진 땅들만 외롭게 펼쳐졌을 때 이사를 가서 점차 반짝이는 도시가 되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다 떠나왔다. 보기만 해도 멋들어진 수많은 건물들과 상가들, 그리고 SRT 기차역이 들어오고 사람들은 더욱 흥분해서 거리를 몰려다녔다. 아파트 바로 앞에서 슬리퍼를 꿰차고 뛰어가면 3분 만에 엄청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영화관이 있고 택시를 타거나 동네 정육점에 단골로 다니다 보면 여기 사느냐고 부러움에 섞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곳이었다. 동탄신도시는 화성이라는 공식 지명을 가진 곳인데 나는 밤마다 창밖으로 수많은 불빛을 발하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화성의 '화'라는 글자는 불을 뜻할 것이라 생각했다. 빛의 도시. 너무나 화려했고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만큼의 애정을 가진 그곳을 떠나 나는 2019년 낯선 도시 김포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온 날이 11월 30일이었는데 그 때로부터 거진 3개월간 나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고 창문 밖으로 쌓인 눈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집에 틀어박혀 예능 프로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나는 언제나 익숙함을 좋아한다. 사실 안전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을 도전하고 싶다고 말하고 늘 다른 나라로 떠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것을 사랑하지만 사실 나는 항상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도는 삶을 보내왔다. 그다지 계속하고 싶은 일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 사업을 김포에서도 생계로 이어서 하기 위해 상가를 알아보려 이 도시를 뱅글뱅글 돌 때도 낯섦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나를 적잖이 힘들게 했다. 낯선 곳에서 위로를 얻기보다 살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트 하나도 어딨는지 알 수가 없었고 이 도시의 생태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사람마저 공기마저 낯선, 내가 살게 될 거라 상상도 못 한 어떤 도시는 내게 이벤트라기보다는 스트레스에 가까웠다. 그래서 퇴근길은 누구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도 참 아이러니했다. 이사 온 집 자체도 낯설어 예전 집을 그토록 그리워했으면서 막상 밖에 나가면 그래도 집이라고 어서 들어가고 싶어 진다니.


길을 걸으며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 마치 미운 사람 보듯 눈길을 주지 않고 틀어박혔던 지난겨울이 생각났다. 그렇게 이 도시는 내 애정에서 완전히 멀어진 채 첫 계절을 보냈었고 지금 두 번째 그때의 계절이 오기 전의 도시를 나는 두 발로 꼭꼭 밟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지금도 확연히 떠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이사를 올 집을 찾기 위해 차를 타고 이 도시를 마땅찮은 마음을 숨기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문득 한 가지 특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게 뭘까 생각하다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하늘이 동탄보다 커'

느낌이 강렬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내가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냈을 때 함께 있던 지인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늘이 어떻게 더 클 수가 있냐는 것이다. 어디선가 듣기로 몽골에 가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시야를 가리는 사물이 거의 없어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먼 지평선이 역시 설명하기 힘들 정도의 길이로 펼쳐져 있는데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약간 휘어진 형태가 보일 정도라는 것이다. 해가 밀려나고 어둠이 올라오는 그 모든 시간들이 지루하지만 장엄한 이야기처럼 이어지다가 밤이 되어 별이 나타나면 왜 별이 '뜬다'라고 하는지 확연히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도시는 정말 하늘이 넓었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 나선 길을 걸으며 나는 한번 더 그 생각을 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유난히 더 조용한 동네이다. 그건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늦가을의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어디서 자동차나 자전거가 튀어나올 걱정 없이 오디오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이 시간이 '정말 좋다'라는 마음이 한껏 올라오기 시작했다. 왼편에 도로를 두고 가로수가 심어져 있는 길로부터 오른편에 사람들이 사는 집까지 폭이 10미터는 되는 인도가 있다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 나 혼자 걷고 있다면 동탄 사람들도 믿지 않을 것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으며 나는 천천히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생생함을 뽐내는 가로수들의 푸른빛이 햇볕을 받아 반짝이고 그 사이에 먼지처럼 뽀얗게 쌓인 거미집이 보였다. 바람에서 오전의 햇볕 냄새가 물씬 풍겼다. 조용한 상가들은 작지만 각기 나름의 물건을 팔기 위해 문을 열고 소박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른편에 보이는 아파트에는 이사를 오는 것인지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사다리차가 올라가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아파트 이름을 구경했다. '반도유보라'. 수없이 오가던 도로였는데 아파트 이름을 처음 보았다. 화단에 신발이 한 짝 떨어져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신발이 저렇게 떨어질 수 있나 생각했다. 두 걸음 더 가서 보니 같은 신발의 나머지 한 짝이 또 떨어져 있었다. 미스터리가 가중되었다.


더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걷다 보면 생각보다 정말 많은 물건들이 주인으로부터 덩그러니 떨어져 난데없는 곳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버렸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멀쩡하고, 이런 것을 잃어버리고 집에 들어가면 괜찮은 건가 싶은 물건들도 많다. 작은 연못 옆에서 발견된 겨울용 장갑 한 짝은 10미터도 안 가서 벤치 위에 나머지 하나가 더 있어 묘하게 짝을 맞추고 싶은 욕구가 들게 했다. 아이들이 타는 킥보드는 밥 먹으라는 소리에 다급하게 달려간 것 같은 인상을 주며 뾰로통하게 쓰러져 있기 마련이다. 놀이터 의자에는 대개 외투가 떨어져 있고 일부러 그런 건가라는 의심이 드는 책가방도 종종 보인다.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장바구니라고 하기엔 맵시가 꽤 있어 보이는 가방도 보이고, 여성용 카디건도 고이 접혀 샐쭉하게 놓여있다. 사람들은 수많은 물건들을 거리에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낯섦을 싫어한다기보다는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첫날 걷기를 하며 내 패턴을 보고 더 확실히 깨달았다.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 그리고 112가 문자 신고도 받는 세상 속에서 다 큰 어른이 길을 잃을까 봐 차로 다니며 아는 길만 쭉 걷다 익숙한 곳이 끝나면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며 걷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귓속 이어폰에서는 이런저런 하정우의 에피소드들을 계속 읽어주고 있었다. 이상하게 혼자 걷는 기분이 아니어서 뭔가 든든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걷는다면 내일 또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좀 더 멀리 가봐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첫날 그렇게 나는 일만보를 넘게 걸었다.



Pacer 앱은 다 걸은 후 경로를 보고 내 걸음을 추적하는 데 큰 재미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