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연어는 뭐 하고 살까
우리는 평생 스스로에게 휘둘린다. 버드맨이라는 영화를 보면 에고는 힘이 세다라는 말이 영화 전편에 흐른다. 예전에 내가 잘 나갔다는 자존심 같은 것.
연어는 강가에 올라와서 알을 낳고 그 알을 다른 버들치? 같은 다른 물고기들이 먹어치우지 않게 하려고 자기 지느러미로 모래를 훑어서 덮어 놓는다. 더 빨리 더 깊숙하게 덮으려도 개울 바닥의 모래를 쓸다 보면 나중에는 꼬리지느러미가 갈퀴만 남아서 앙상해진다. 그렇게 참혹해질 때까지 자기 후손을 남기려는 욕망은 도대체 어디서 오늘 것일까.
우리 인간은 이 연어들과 얼마나 다를까. 어릴 때는 사소한 장난감을 가지고 서로 다툰다. 사소한 욕망이다. 조금 커서는 친구들과 사소한 정의로 싸우기도 한다. 친구가 나보다 늦게 왔는데 왜 앞에 서냐는 이런 것으로 엄청나게 싸운다. 그리고 커서는 좋은 대학을 가겠다고 삶의 투쟁을 이어가며 성인이 되고나선 다른 친구들에게 잘난 척하는 재미로 누구는 또 그런 친구들한테 기가 죽기도 한다. 직장에 가서는 그 조직에서 좀 더 잘 나 보이고 인정받으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몸이 축나기도 하고 공황장애니 갑상선 항진증이니 때론 암까지 자기를 몰아세운 대가를 마주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연어와 인간이 많이 다른가? 연어는 종족 보존을 위해서 우리는 다른 이보다 잘나 보이려고. 하나는 원시적이지만 확실하고 단순하며 또 하나는 자기애적이지만 사실은 종족 보존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빗자루처럼 대만 남은 꼬리지느러미로 모래를 덮어대던 연어는 결국 죽어서 그 주변으로 흩어지고 자기 새끼의 양분이 된다. 인간이든 연어든 이 세계의 존속을 위한 메커니즘 속에 있다는 건 차이가 없다. 우리는 좀 더 교묘해서 헷갈릴 뿐 혹은 스스로를 제대로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물고기가 물에 대해서 뭘 알겠는가라고 누가 말했듯이.
그러면 어떤 연어가 나는 그렇게 희생하는 길을 가지 않겠다며 바다에 그냥 머무르면 더 행복할까. 목적이 없는 삶. 물이 흐르는 게 귀찮다고 어디 고여 있으면 썩게 된다. 허무의 고통이 찾아온다. 이 세상에 나온 순간 외통수다. 운명, 굴레 뭐라고 불러도 흘러가야 된다.
다행히도 우리는 스스로를 조금은 뒤돌아 볼 줄 안다. 잘못된 욕망에 지느러미를 갈아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내 발아래를 한 번 살핀다. 내가 가야 할 곳을 고개 들어 한 번 보고 다시 힘차게 지느러미를 파닥여 본다.